[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⑨파평 윤씨 문중 묘와 보학 예절

2006. 11. 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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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공부를 한답시고 남의 묘를 살피고 다니다 보면 가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수천년 된 고인돌을 탐사하며, 장사 지낸 지 천년이 넘는 옛 무덤 앞에서, 명당 중 명당이라는 재벌이나 정치인 산소를 눈치껏 살피며, 갑자기 떼돈 벌어 왕릉같이 꾸며 놓은 졸부의 호화분묘 앞에서, 때로는 살아서의 행적에 비해 너무 초라한 폐묘를 지나치며 말이다.

수없이 오르내리는 답산 길에서 한결같이 얻어지는 결론이 하나 있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의 한 생을 살 테면 제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잘 살아 봐야 100년 남짓인데 함부로 살았다간 무서운 역사의 멍에가 씌워진다. 그 악업의 굴레는 모조리 후손들의 몫으로 연좌제보다 더 가혹한 역사의 심판이 영영세세토록 이어지고 만다.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묘를 취재하러 가는 차 안에서 누가 그런다. 사람끼리 척지거나 원수지고는 살 일이 아니라고. 더더욱 가까운 친구나 친·인척 간에는 척지고 살 게 아니란다. 물어 물어 묘를 찾아가는 데는 두 분의 이름보다는 '대윤묘' '소윤묘' 해야 더 잘 통한다. 이들의 묘는 전혀 다른 곳에 따로 있었다.

◇경기도 파주의 소윤 윤원형 묘. 대윤과는 9촌 간이었고 문중 간 불화가 국정농단으로 이어졌다. 삭탈관직당해 비석은 나중에 세운 것이다. 뒤쪽에 정난정의 묘가 보인다.

파평(坡平) 윤씨 문중 묘역 하면 우선 경기도 파주시를 떠올린다. 이곳 교하읍 당하리 산4-20번지의 방대한 땅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된 22만여평의 산록에 96기의 산소가 모셔져 있으며 여기에 윤원형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내로라하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소윤 묘는 해좌(북에서 서로 30도) 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 남한의 청주를 나경 중심으로 가정하면 인천에서 부산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삭탈관직을 당했을 뿐 멸문지화는 면했으므로 돼지띠와 뱀띠의 후손들이 돼지해와 뱀해가 돌아올 때마다 길흉화복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번 산행에는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임원 20여명이 함께했다. 윤갑원 교수는 이곳에서도 전임 강의를 하고 있다. 명당 판정과 입수 용맥 재는 것을 확인하느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이상돈 청주지회장이 묻는다.

"윤 교수님도 파평 윤씨신데 이분들과 촌수는 어찌 되시나요?"

간산 길 떠나면서부터 묻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직조(直祖)는 아니고 방조(傍祖)가 되십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네요. 윗대 조에서 분파되었습니다."

소윤 묘를 살피던 중 당판 왼쪽 섶에서 정난정의 묘를 찾아냈다. 초계정씨난정지묘(草溪鄭氏蘭貞之墓). 내심 반가웠다. 역시 해좌사향으로 묘는 초라하지만 그래도 남편 곁에 묻혀 있어 마음이 놓이는 심사는 무엇일까. 수년 전 TV 사극에 '여인천하'가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여인이다.

역사는 그녀를 노비 출신 애첩으로 윤원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에 오른 악녀라고 사정없이 매질한다. 소윤의 친누이였던 문정왕후와 함께 끼친 역사의 누는 왕조실록에 기록된 대로지만 지난 사실(史實)들을 표독스럽게만 보아 버리면 절통함만 더해질 따름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대윤 윤임 묘. 소윤 윤원형에게 사사(賜死)당해 묘석조차 제대로 없다. 초라한 문인석이 굽어보인다(왼쪽), 가까이서 본 정난정 묘. 윤원형의 묘역 안에 있으며 초계 정씨였다.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했다.

소윤파 문중의 윤훈덕(59·종산관리사 겸 묘지제례담당)씨도 생몰연대까지 정확히 제시하며 선조들의 치적을 설명하다가도 이분들의 행장(行狀)이 거론되면 슬며시 웃어넘기고 만다. 일일이 안내하며 촌수관계와 묘역관리 상황을 들려준다.

물론 윤 교수와도 한 문중이나 구태여 촌수는 안 따져 본다.

"파평 윤씨의 중시조가 되는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王番·1384∼1448)은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낸 분입니다. 세조대왕의 장인으로 정희왕후 윤씨의 친정아버지이며 소윤의 5대 할아버지입니다. 당시 임금이 하사한 사패지였으니 얼마나 기름지고 산세 또한 좋았겠어요."

한참을 걸어 윤번의 묘에 다다르니 말 그대로다. 윤번의 묘(해좌사향)는 부인 인천 이씨(건좌손향)와 합장이나 쌍분으로 용사하지 않고 상하로 모셔져 있다. 산 혈(穴)이 모자라거나 좁을 때는 좌우로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떠오른다. 용·혈·사·수의 사신사에서 좌우 당판이 머문 곳까지 온화하고 따뜻하다. 청명한 날에는 삼각산이 먼 조산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혈처다.

윤 교수가 "이 자리에서는 정정공 묘도 건좌손향이어야 하는데…" 하면서 내룡맥을 재본다. 간(艮·북동) 입수에서 해좌(亥坐·북서)로 홱 돌아선 천룡(賤龍)에 가까운 맥이다. 천룡자리는 무관이 나오거나 발복이 빠른 용맥으로 번신(?身)과 기복이 심한 산등성이를 말한다. 누구나 선조의 묘를 살피면서 이런 내룡을 만나면 주목해야 한다.

꼼꼼히 살펴 보니 정정공 묘 입수 내룡맥이 용사한 당판 혈처와 끊어져 있다(사진 참조). 윤 교수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른다. 그 옛날 당대 실세의 묘를 쓰면서 왜 이걸 소홀히 했을까. 5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맥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이 5m의 맥이 연결되지 않아 후손들 간 분란이 야기됐다고 해석한다면 너무 앞서가는 풍수에 대한 과신일까.

아무튼 윤번의 고손자(4대손) 윤임과 5대손 윤원형은 패가망신하도록 싸웠다. 윤원형의 생질(제13대·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9촌 아저씨 되는 윤임을 왕명으로 사사(賜死)시켰고 친형인 윤원로마저 유배시켜 죽였다.

◇파평 윤씨 문중 묘역에서 사신사와 국세를 설명하는 윤갑원 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 삼각산이 먼 조산으로 다가오는 혈처다.

이번에는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향동동 봉산자락. 대윤 윤임 묘를 찾기는 정말 힘들었다. 고양시청 문화과는 물론 이 지역 향토사학자까지도 금시초문이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윤파 문중의 윤주일(尹柱一·53)씨 안내로 그의 묘 앞에 섰다. 비석조차 제대로 없어 후손의 동행 없이는 당판에 서서도 지나칠 묘다. 수개월 전 도굴당해 복원시켜 놓았다고 설명한다.

오좌(정남) 자향(정북). 참으로 드문 혈처다. 산세에 따라 북향도 용사하지만 혈처 앞이 내리 쏠리며 복토로 돋워 놓은 부토가 역력하다. 입수 용맥이 정미(丁未), 미곤(未坤), 경유(庚酉)의 삼지파(三枝破)로 갈라졌다. 당시 윤원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때인데 누가 나서서 감히 좋은 자리를 잡으려 했을까 싶다. 기념물이나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다.

중국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올랐다. 조비는 동생 조식이 자신보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늘 시기하고 죽이려 했다. 조비가 동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못 지으면 죽이겠다고 했다. 조식이 울면서 지은 게 칠보시(七步詩)다.

자두연두기(煮頭燃豆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재두부중읍(在豆釜中泣·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본욱동생근(本昱同生根·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무슨 원수로 이리도 급히 삶아 대는가)

콩대를 형에, 자신을 콩에 비유하여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렇게 자기를 들볶는 것이냐'는 뜻을 넌지시 읊은 것이었다. 조비는 크게 뉘우치고 그 후부터 동생에게 잘했다고 한다.

대윤파와 소윤파는 현재까지도 왕래가 별로 없다고 한다. 문중 간 행사나 시제가 있을 때도 서로 바라만 본다고 했다. 파주 문중땅 소유권을 둘러싼 6년 송사가 대법원 확정 판결을 앞두고 있는 실정이다.

◇윤임의 어머니 순천 박씨 묘(위)와 몸종 묘.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을 아래위로 쓴 예는 조선묘제에서도 찾기 힘들다.

후일 율곡 이이는 대윤 윤임을 두고 '죄가 없다' 했고 퇴계 이황은 '죄가 없지 않다'고 평가했다. 나머지는 후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윤임 묘를 내려오다 보니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 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위 아래로 용사했다고 한다. 드문 묘제다.

따지고 보면 한 문중에서 당대 왕비를 둘씩이나 배출하다 보니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던 권력욕에서 비롯된 싸움이다. 대윤의 동생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았고, 소윤의 누이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셋만 길을 걸어도 스승이 하나 있다고 했다.

기제사나 상가 문상 시 향로에 술잔을 몇 바퀴씩 돌려 올리는 게 제대로 갖춘 예의냐고 누가 묻자, '그건 절대 아니다'라고 정색한다. 상·제례는 생존시와 똑같이 여기고 모시는 예절이라며 "모처럼 고향집을 찾은 아들이 부모님께 잔을 올리면서 서너 바퀴 빙빙 돌려 드시라고 권하면 기뻐하시겠느냐"고 못을 박는다.

이번에는 일가끼리 만났을 적 나이와 항렬(行列) 중 어느 쪽이 먼저냐고 묻는다. 때마침 시제철이어서 적절한 질문일 듯 싶다. 이번에는 보학(譜學)이다.

마땅히 ①연고(年高·나이) ②항고(行高·항렬) ③경고(經高·벼슬이나 사회경력) ④학고(學高·학력)순으로 존중했다. 가까운 친척일수록 항렬이 우선이었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나이와 항렬 중 어느 쪽이 먼저냐는 논쟁은 어떤 종친회 이사회서 정식 거론된 적이 있음을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옛날에는 한 울타리 안에서 10촌이 난다고 했다. 대윤과 소윤은 9촌 간이었다. 윤임(1487∼1545년)과 윤원형(1509∼1565년)이 살던 때는 연산군 학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황해도 구월산에 도적 떼가 창궐하여 임꺽정이 백성의 영웅이던 시기다. 이들의 불화가 빚어낸 국정농단과 인명피해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다.

주막집 새벽 등잔 파르르 꺼지려는데/일어나 별을 보니 헤어질 때로구나/껴안고 말 없이 둘 다 말 없이/잘 가라 하려니 기어이 울음 터져.

다산 정약용이 귀양길에서 형과 헤어짐을 탄식한 시다. 문중마다 형제간의 우애가 이렇게 다를까. 아무 사심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예나 지금이나.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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