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언덕' 종로 5가 사람들] (상) 군사정권에 맞서다

2006. 3. 2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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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5가는 구한말 갖바치,배추장수,배오개시장 상인,종묘 순라군,백정 등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이 살던 곳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연지동 인근 대지를 구입하면서 '선교언덕'이라는 불리던 이곳이 기독교 민주화·인권운동의 산실이 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던 기독교 진보진영은 억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한 쉼터가 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이른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을 중심으로 '종로5가 사람들'이 형성됐다.

◇'종로5가 사람들' 누구인가=1970∼80년대 형성된 5가권은 크게 진보계열 교회 사역자,KNCC,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등에 참여한 국내파와 YMCA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WSCF) 등에서 활동한 해외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군부독재 종식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신학적 신앙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사회 선교에 앞장섰다. 특히 장공 김재준,씨알 함석헌 등의 진보 신학을 기독인의 존재 이유와 삶의 방향으로 삼았다. 급격한 경제개발과 도시화에 따른 빈부격차와 도시빈민 형성,열악한 노동환경 확대와 인권 무시 등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중심인물로 김관석 강원용 박형규 조승혁 김상근 허병섭 권호경 김동완 이해동 인명진 오충일 목사와 이재정 신부 등이 있다. 기독학생그룹은 이직형 김경재 정상복 차선각 등을 꼽을 수 있다.

강문규 오재식 박상증 안재웅 박경서 등으로 대표되는 해외파는 국내의 척박한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이 CCA 산업선교담당간사로 활동한 이래 박상증(현 참여연대 공동대표) 목사가 1981년 CCA 부총무,1985년 총무에 피선되면서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도 선도해 나갔다.

여기에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설파하고 대한기독교서회가 월간 '기독교사상'을 통해 운동의 실천적 이론과 토대를 제공했다. 조직신학자 서남동,성서신학자 안병무,기독교윤리학자 현영학 등이 민중신학의 대표주자다. 서광선(이화여대) 주재용(한신대) 교수 등도 가세했다.

◇민주화 인권에 앞장선 '종로5가 사람들'=5가권이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전진기지가 된 것은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유신 등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1960년대 진보진영은 정치적 이슈보다는 도시빈민 문제 등 사회적 부조리 척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엔 (기독교 진보진영이) 정권 군부에 대해 어떤 판단도 갖고 있지 않았어요. 군사 쿠데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던 터에 유신 등 일련의 사태가 이어지면서 옳지 않은 정치세력임을 확신하게 된 거죠. 따라서 5가권을 특정인을 중심으로 구분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민중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대한 그 시대를 산 기독인들의 신앙적인 대답이자 역동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상근(KNCC 발전개혁특위위원장) 목사의 증언이다.

정치 권력과의 갈등에 따라 성서적 신학적 성찰과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1973∼74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와 관련해 오재식 전 회장은 최근 KNCC의 '운산 에큐메니컬 강연' 자리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잘못된 구조와 정책을 변화시켜 나갈 것을 선포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은 지하에서 발표된 뒤 조심스럽게 해외로 흘러 나갔다"며 "이를 접한 해외 한국 기독인들은 눈물로 기도했고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고 밝혔다. 또 1974년 11월에 발표된 '…신학적 성명'은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민주화 투쟁을 위한 기독교적 원칙이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로마서 13장을 인용,"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긴급조치가 연달아 발동되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등이 터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교회 인사들의 무더기 구속 사태로 인해 KNCC는 인권위원회를 조직했다. 같은 해 7월 구속자를 위한 목요기도회를 시작했다. 앞서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이 있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목요기도회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된 것. 결국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고야 말았다.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타협 아닌 타협'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회의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에서 열렸다. "자초지종을 얘기했죠. 그러자 모두가 '당신이 나와야 계속 일을 진행할 수 있다'면서 감싸주었습니다." 김상근 목사는 이처럼 5가권의 결속력이 대단했다고 술회했다.

이에 군사정권은 끊임없이 5가권 분열 공작을 벌였다. 내부 갈등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사건'을 들 수 있다. 1975년 4월 김관석 KNCC 총무를 비롯해 박형규 조승혁 권호경 목사가 당국에 연행됐다. 독일의 기독교봉사단체인 'BFW지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6월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당시 독일 BFW의 담당국장인 볼프강 슈미트가 우리나라 법정에서 증언하고 WCC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결국 김 총무는 징역 6개월,박형규 목사는 10개월,조승혁 권호경 목사는 각각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일부 인사가 5가권에서 멀어졌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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