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정-포석정 역사를 왜곡하나

2005. 8. 3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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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추연만 기자]

▲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식 소장이 나정 발굴현장서 신라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2005 추연만

"일제가 신라 건국신화를 전면 부정해 왔으나 나정(蘿井)에 우물이 있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식민사학 허구가 드러났다. 이제 한국고대사를 되찾는 작업을 할 때다."

- 사적 245호 나정(蘿井) 발굴현장에서 서강대 이종욱 교수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 신라를 망쳤다'는 얘기는 일제가 부풀린 것이다. 먹고 놀기 좋아하는 민족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라멸망 현장으로 포석정을 부각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 사적 1호 포석정에서 문화해설가 공성규씨

백제 풍납토성, 신라 나정 발굴 등 고고학 성과로 인해 일제 식민사학 허구성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식민사학은 한국고대사 가운데 신라 초기 역사를 전면 부정한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신라 건국과 연관이 깊은 경주 나정(蘿井) 발굴 결과는 지금까지 왜곡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난 8월 중앙문화재연구원은 3년에 걸친 나정 발굴 조사 결과, 혁거세 건국신화에 나오는 우물터는 물론 8각 건물터와 제사 시설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나정은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신라 건국의 현장이며 건국 시조를 모신 신궁(神宮)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당시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많은 전문가들은 "나정 발굴로 신라건국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닌 역사 사실로 입증된 것"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또한 나정 발굴과 더불어 주변 유적 연계조사 등 추가 연구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남산 서쪽 자락과 인접한 나정이 있는 경주시 탑동은 오릉을 포함에 남간사지, 창림사지, 금강사지 등 초기 신라시대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 나정 발굴 현장과 포석정 인공수로. 일제는 '신라건국 현장'인 나정은 전면 부정한 반면 포석정은 '신라멸망 상징'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2005 추연만

일제는 왜 신라 건국을 전면 부정했나

식민지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고대사를 악용했으며 이때 등장한 것이 식민사학이다. 식민사학은 한국고대사 가운데 특히 신라 초기 역사를 전면 부정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신라 초기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면 일제가 만들어낸 역사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사학계는 "왜가 한반도 동남부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란 기관을 두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주장은 이후 고고학 발달에 따라 허구로 밝혀졌으나 최근 일본 후쇼사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해 한국사 왜곡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식민사학은 1919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란 논문을 통해 그 신호탄이 쏴 올려졌다. 쓰다는 이 논문에서 신라 건국 설화 등이 기록된 신라 초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기록이 조작됐다는 억지도 부렸다.

쓰다는 왜 '삼국사기 초기기록 조작론'을 들먹였을까? 왜병이 한반도 동남부에 출몰해 약탈한 사실 등이 기록된 삼국사기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한 그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인(일본 사람)에 대한 기록을 애써 외면할 목적으로 삼국시대 초기 기록을 통째로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혁거세 신화 등 신라 초기 역사도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다.

▲ 일제시대 촬영 사진. 포석(전복 껍질을 닮은 돌) 인공수로 위치가 지금과 차이가 많다. 일제는 보수 후 포석정을 사적1호로 지정했다.
ⓒ2005 경주남산연구소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삼국사기 불신론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논리로 학문적 근거가 없다"며 "한국고대사가 정치 논리에 따라 망신창이가 된 경우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그는 또 "이런 식민사학 주장이 한국인 제자들에게 계승되고 지금까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사학계 현실도 꼬집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로 발표한 이병도 등은 식민사학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식민논리를 연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식민사학, 학문적 근거가 없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지난 6월 서강대 이종욱 교수도 신라 초기 역사를 부정한 식민사학 흐름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서 '우리교과서를 왜곡 시키는 후식민사학을 넘어 본연의 역사 찾기'란 글을 통해 이병도, 노태돈 등 국내 주류학자 이름을 거명하며 식민사학 잔재를 비판했다.

그는 식민사학 대표적 잔재로, 주류 역사학계가 여전히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않고 삼국시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예로, 2005년에 발간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 4세기 이전 신라 국가 존재를 부정하고 진한의 한 소국인 사로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또 그는 최근 고고학 발굴 성과로 식민사학 허구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풍납토성 발굴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역사는 되살아났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신라 건국신화의 현장인 나정 발굴 결과, 8각 건물지가 나오고 그 중심에 우물이 나타난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건국신화 현장이 찾아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신라건국신화는 식민사학은 물론 후식민사학이 허구란 주장과 달리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임이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 오늘날 포석정. 고고학 발달로 포석정은 '신라왕 놀이터'가 아니라 신라인들이 '호국제사를 지낸 성지'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신라 멸망 현장이 아닌 경애왕이 견훤에 맞서 투쟁한 곳이란 주장도 있다.
ⓒ2005 추연만

일제는 포석정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나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식 소장은 "경주 문화인 가운데 포석정이 신라왕의 놀이터란 얘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잘라 답한다. 경주 남산이 신라호국 성지란 걸 알면 그런 해석이 나올 수 없다는 것. 문화단체인 '신라사람들'의 공성규 팀장도 "역사문헌과 고고학을 종합하면 포석정은 신라인이 호국제사를 지낸 성지"라며 일제가 꾸민 '포석정은 놀이터' 얘기가 아직도 돌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신라 건국 역사를 의도적으로 부정한 일제는 나정과 500m 남짓 거리에 있는 포석정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아마 일제는 '포석정=신라멸망 현장'이란 얘기를 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유구한 신라 역사도 보잘 것 없다는 식민 이데올로기와 딱 들어맞는다. 경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일제가 포석정을 정비한 후 사적 1호로 지정한 날은 1922년 8월 27일로 나온다. 당시 일제는 1919년 3·1운동 후 소위 문화식민통치를 했으며 석굴암 등 문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시대였다.

일제는 수많은 사적 가운데 왜 포석정을 사적1호로 지정했을까? 공성규 팀장은 "일제는 우리 민족이 먹고 놀기 좋아한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라 멸망 현장으로 포석정을 집중 부각하기 위해 포석정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단호히 주장했다. 그는 또 "그런 왜곡에도 불구하고 이젠 포석정 찾는 많은 분들은 일제가 퍼트린 얘기를 믿지 않고 있다"고 유적답사 현황을 전했다.

/추연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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