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이 신라왕의 '놀이터'라고?

2005. 8. 2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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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추연만 기자]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 먹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죽었다"는 이야기 탓에, 포석정은 신라 멸망의 상징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다. 또 포석정은 신라왕과 신하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향락의 장소로 덧붙여 설명되곤 한다.

▲ 경주 남산자락에 있는 포석정에 돌로 만든 인공수로. 그 옆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육박 .
ⓒ2005 추연만

포석정은 과연 신라인들이 술 마시고 노는 장소였을까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포석정 주위에는 신라초기 유적을 많이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서쪽 자락으로 들어오는 곳에는 '오릉'이 있으며 최근 우물터 등이 발굴됨으로써 박혁거세 탄생설화와 연관이 깊은 곳으로 밝혀진 '나정'도 포석정과 500m 남짓한 거리에 있다. 또한 박혁거세 첫 궁궐로 알려진 '창림사' 터도 나정과 포석정 사이에 있다.

이렇듯 신라초기 유적이 밀집된 지역이며 신라 성지로 여긴 경주 남산 자락에 있는 포석(전복모양 돌)정이 과연 신라인들이 술 마시며 시를 짓던 놀이터였을까?

포석정이 신라 멸망의 비운의 장소로 기록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55대 경애왕은 927년 음력 11월, 겨울에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왔는데도 왕비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라 견훤에게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졌고 신라 멸망의 현장으로 얘기돼 왔다.

그러나 포석정 기록은 '후삼국 X파일'로 불릴 정도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아직도 많다. 비록 내부에 후백제 파가 득세하는 등 왕권이 약한 상태라 해도 신라왕이 적이 쳐들어 온 줄 모르는 채, 포석정에서 놀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납득이 잘 가질 않는다.

▲ 포석정 돌홈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듯, 선조들의 뛰어난 과학적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2005 추연만

견훤이 쳐들어온 때는 음력 11월 한 겨울인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궐과 가까운 안압지와 같은 연회장소를 두고 굳이 남산자락 포석정에 놀이판을 벌인 것은 의문이 든다는 것.

이에 최근 고고학 성과에 따라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주 남산은 140여 곳 절터와 500여 개 불상과 탑들이 들어선 곳으로 그 자체가 '신라의 성지'란 해석이다. 최근 나정에 박혁거세 설화와 연관된 우물터와 제사시설이 발굴된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한편으론 고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신은 포석정에서 호국신(남산신)께 신라의 안위를 빌며 견훤에게 끝가지 저항하다 죽었다는 새로운 해석. 문헌에 나오는 '유포석정'이란 문구는 지금까지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고 해석되었으나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다(유)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석정은 신라인들이 호국제사를 지낸 성지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 신이 왕에게 춤을 추었는데 왕이 손수 신의 춤을 흉내냈다는 기록도 있어 포석정은 호국제사와 연관이 깊은 시설이란 해석을 낳게 한다.

또한 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99년 포석정 주변 발굴 결과, 제사시설로 추정되는 건축유적과 통일신라 이전의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포석정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호국 성지 역할을 한 것이란 추정을 뒷받침했다.

나아가 1995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포석정과 연관된 '포사(鮑祀)' '포석사(鮑石祀. 사(祀)는 제사를 뜻함)'란 말이 나와,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다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높아졌다. 또 포석사에 중요한 인물의 화상이 있었고 진골 이상 고위 신분이 결혼식을 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었다.

▲ 신라인의 성지인 남산자락에 세운 포석(정)은 호국제사를 지낸 성스런 행위를 하던 곳이란 해석이 많다.
ⓒ2005 추연만

이에 포석사는 마치 신궁(神宮. 왕이 제사 지낸 곳)과 세트처럼 활용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와 관련 최근 나정 발굴현장에서 신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어 이 기록의 신빙성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면 포석정이 이처럼 호국제사를 지내는 성스런 곳이었다면 오늘까지 남아있는 돌로 만든 물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포석정이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라면 중국 명필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는 우리가 흔히 아는 호사스런 놀이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유상곡수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정을 시로 표현 것으로 당시 문인들의 놀이 가운데 가장 깨끗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들도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법으로 이것을 했다는 해석이다.

/추연만 기자

덧붙이는 글<일제 흔적이 깃든 포석정 그리고..> 후속기사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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