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운반 5년에 풍월을? 이제 진짜 소리가 들려요"

입력 2013. 5. 23. 20:10 수정 2013. 5. 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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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나도 문화인 ① 국내 유일 '하프' 전문운송인 박성현씨

[한겨레] [문화'랑']나도 문화인

① 국내 유일 '하프' 전문운송인 박성현씨

사람보다 큰 덩치에 무게는 40㎏보는 순간 놀랐다아파트 3층에서 연주장까지 옮기고집에 돌아와 몸져누웠다이튿날 마음을 고쳐먹었다내가 쉬면 연주회도 없다고

고대 그리스 최고의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저승세계를 찾아간다. 그는 리라 연주로 지옥의 신 하데스를 감동시켜 아내를 구해낸다. 그가 연주했던 리라가 서양 악기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로 꼽히는 오늘날 하프의 전신이다.

박성현(37)씨는 이 하프를 공깃돌처럼 다루는 전문가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프를 전문적으로 운송하는 이다. 국내 하프 연주자들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고, 국내에서 하프가 연주되는 연주장엔 어김없이 그가 나타난다.

하프는 대부분 개인 악기여서 연주할 때마다 공연장으로 옮겨야 한다. 연주용 하프는 높이 170~185㎝에 넓이가 100㎝가량으로, 무게는 케이스 포함 40㎏가 넘는다. 사람만 한 덩치에 대당 7000만원에서 1억원 가량하는 값비싼 악기여서 운반 자체가 쉽지 않다. 옮기다가 울림통이 망가지면 악기의 생명은 끝. 그래서 다른 악기들과 달리 하프만 전문적으로 운송하는 이들이 따로 있다. 바로 박성현씨다.

박씨는 1년에 250개 넘는 하프를 옮기는 전문가다. "거의 매일 다루는 셈인데도 늘 긴장합니다. 자칫 악기에 문제가 생길까 봐 운반하기 전에 늘 무대에서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위치를 확인하고, 연주 도중 하프가 퇴장하는 시기는 언제인지, 운반 동선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합니다. 하프가 인생의 업이 되다 보니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 박수소리를 들으면 하프 연주자 못잖게 보람을 느껴요."

그는 2008년 4월 지인의 소개로 이 일을 시작했다. 멋모르고 달려들었는데 힘이 장사인 그도 처음에 엄청난 크기의 하프를 보는 순간 질려버렸다. "자신이 없다"고 했다가 "60살 노인인 아무개씨도 하는데"라는 핀찬을 듣고 오기가 발동했다. 그날 아파트 3층에서 하프를 연주장까지 옮기고 난 뒤 집에 돌아와서 몸져누웠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연주장에서 관객들의 환호하는 모습이 밤새 떠올라 이튿날 마음을 고쳐먹었다.

국내 하프 운반 전문가의 '시조'로는 40여년 전 이 일을 시작한, 지금은 은퇴한 구준회씨가 꼽힌다. 그 뒤 이용기씨가 30여년을 해왔다가 최근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고, 5년차에 접어든 박씨가 국내 유일의 '전국구 하프맨'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수첩에는 하프 운송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쉬는 날이 없다. 그가 쉬면 연주회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말한다. 연주회와 중·고·대학 입시가 몰리는 매년 10~12월에는 운송 차량에서 잠을 자면서 한 달에 100번 넘게 하프를 운반한다. 몇해 전에는 하프를 들고 야외 연주회가 열린 대전 계족산(424m)을 오르기도 했다.

"하프는 절대 맨바닥에 놓으면 안 됩니다. 눈이나 비가 오면 하프는 케이스로 보호하지만 저희는 그냥 비를 맞고 옮깁니다. 우비 때문에 시야가 가려 악기를 나르는 데 지장이 생기면 큰일이 나거든요."

그는 지난해 5월5일 어린이날 열린 '제1회 코리안 하프 페스티벌'을 잊지 못한다. 서울과 인천, 용인, 수원 등에 흩어져 있는 하프 132대를 서울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에 옮겼다. 5일 동안 동료와 잠도 못 자고 밥도 거르며 옮기느라 얼굴에 대상포진이 퍼져 피부색이 꺼멓게 변해버렸다.

"하프 132대가 한꺼번에 모인 것은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같아요. 하프 하나하나 번호표를 달아서 정확하게 모으고, 이틀 뒤 다시 정확하게 하프 주인집에 돌려보냈어요. 일을 끝내고 집에 오니까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복받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무도 못할 것 같은 일을 제 생각대로 정확하게 아무 사고 없이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에 그날 혼자 울었어요."

하프를 운송하다 보니 이제 그에게도 하프 소리가 들려온다. "연주자 실력은 평할 수준이 전혀 못되지만 어린 예술중학교 학생들이 처음 하프를 시작한 뒤 1~2년 지난 뒤 들어보면 '아, 이 녀석 음정이 맞게 돌아가네, 얘 테크닉이 좋아졌네'라고 느껴져요. 칭찬을 해주기도 하죠."

그는 음악을 전공하는 어린 학생들이 악바리 같다고 칭찬했다. 한번은 예원학교 2학년 여학생이 동료 앞에서 실력을 선보이는 향상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는데 인터미션(휴식시간) 때 하프를 보니 줄에 피가 묻어있었다. 하프 줄에 손가락이 베여 피를 흘린 것이다. 2부에서 학생이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짠해지면서 자신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어린 학생들이 전문 연주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같이하면서 실력이 느는 것을 보면 박씨는 학부모 못지않게 뿌듯한 성취감을 느낀다. "남들 보기에는 제가 그저 악기 나르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프로 저와 인연을 맺은 어린 영재들이 훗날 자비에르 드 매스트르나 라비냐 메이예르 같은 세계적인 하피스트로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 일도 정말 보람된 직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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