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키치적 풍자성이 사라진 '강남 스타일'

2016. 9. 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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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스타일로, 상품으로 전화시켜 먹어치우는 문화자본의 왕성한 식욕은 싸이가 보여준 한 줌의 유희와 풍자 정도야 얼마든지 희화화의 상품으로 바꿔버렸다.

구경거리의 시대, 삶의 모든 것이 서푼어치 구경거리가 되어 팔리는 시대, 조금이라도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이라면 앞뒤 재지 않고 우선 상품으로 내다파는 시대, 남루한 가난이든 요사스런 풍습이든 일단 외지인의 관심이 될 만하다 싶으면 분칠하고 포장하여 팔아넘기는 시대, 요컨대 세상 모든 것이 구경거리의 상품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인천은 개항과 식민과 가난을 팔고, 청주는 달동네를 팔고, 곳곳의 소읍들은 나름의 역사와 문화와 인물 대신 드라마 세트장이 가까이 있다고 팔고, 여기 또 가히 동아시아 경제와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선도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강남에서는 기이한 조형물을 내다판다.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본떠 만든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에 설치된 손 조형물. /홍경한 미술평론가 제공

코엑스 광장에 세워진 ‘강남 스타일’

지난 4월 15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활기차면서도 복잡한 서울의 강남, 그곳에서도 핵심 지역인 삼성동의 코엑스 광장에는 상당한 크기의 조형물 제막식이 열렸다. 강남구청(구청장 신연희)이 주도하고 황만석 작가가 제작한 그 조형물은 바로 ‘강남 스타일’. 인기 스타 싸이가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부를 때 안무 동작이었던, 왼손 위로 오른손을 얹고 춤을 추는 바로 그 형상이었다. 무려 높이가 5m이고, 폭이 8m에 달한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다. 뜨거운 여름, 한창 달궈진 코엑스 광장. 조형물이 위치한 곳의 전후좌우로 일제히 기립한 마천루들 때문에, 그리고 이 조형물뿐만 아니라 국기게양대를 비롯한 여러 시설물 때문에 ‘강남 스타일’ 조형물은 멀리서 볼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점점 커졌고, 마침내 그 밑에 서자 높이 5m의 물리적 크기를 뛰어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가수 싸이의 연속된 춤 동작에서는 자연스러웠으나 물리적으로 고착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크기의 양 손목이 여지없이 잘려진 채 포개져 있는 형상은 그것이 싸이의 노래와 연관이 없다고 한다면 결코 그 자리에 세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기억하건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국내외로 인기를 끌었을 때 높은 수준의 격찬이 터져나온 적이 있다. 빅스타의 인기 뮤직비디오를 다수 제작해온 차은택 감독은 “트렌디한 댄스팝인데 키치적인 영상이 네티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는 “싸이는 정신력이 더욱 강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했다. 솔로 가수라서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해체할 우려도 없다”고도 했다.

외신에서도 격찬을 했다. <포브스>는 이 노래가 “한국어로 불려졌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인터넷에는 수천건의 패러디 영상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타임>은 “음악이 귀에 착착 달라붙고(Catchy), 뮤직비디오는 터무니없이 웃긴다(Ridiculous)”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의 진짜 의도는 “코믹하게 묘사된 ‘강남 스타일처럼 살고 싶어하는 어설픈 모습’에 담긴 한국 사회의 과잉된 소비 열망”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평가의 핵심 용어는 ‘키치’다. 키치는 근대예술의 개념으로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미술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유럽이 산업화의 최고조에 이르면서 대중문화의 파급속도도 빨라지고 중산층도 예술품 소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 듯한 그림을 풍자하면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는 이 용어에 사회적 의미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이른바 ‘고급문화’ 또는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의 일상에 뿌리 박은 하나의 예술장르로 확대되어 현대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시대의 흐름과 연관된 용어로 확장된다. 산업화 시대의 대중들의 삶의 태도, 일상, 감각 등이 결합되면서 고전적인 관습을 부정하려는 하위문화적 가능성이 커진 1960년대에 미국이 팝아트, 독일의 신표현주의, 제3세계의 미술운동 등은 일정하게 키치적 방법론을 활용했다. 서구 주류 문화의 지배적 속성에서 벗어나 그것을 해체하거나 전복하는 사유까지 담아냈다.

가수 싸이가 2015년 11월 서울 여의도 콘래드 서울호텔에서 열린 7집 앨범 <싸이다> 발매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풍자도 서푼어치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

이런 관점에서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놀라운 경제성장이 낳은 벼락부자, 성형수술의 라이프스타일을 부드럽게 비꼬고 있다”고 ‘강남 스타일’을 평가했던 것이다. ‘B급 키치 문화 전략’의 풍자성이나 전복적 유희성이 제대로 활용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너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일까. 싸이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라는 프레임과 연관되면서 그만의 독특한 ‘키치적 풍자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겨우 한 줌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강남 스타일’이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싸이는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귀국 공연’을 했다. 사실 그에게 ‘광장’은 각별하다. 병역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싸이는 2002 월드컵 ‘광장 문화’가 열렸을 때, 태극기를 휘감고 응원을 하다가 ‘우연히’ 방송 카메라에 잡히면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 광장에 ‘국제 가수’ 싸이가 금의환향의 ‘귀국 공연’을 한 것이다.

<타임>과의 기자회견에서 “나는 운동선수처럼 국가를 대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한 사람의 대중예술가로 평가받기를 원했지만, 국내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세계로 진출한 한류 스타’라는 프레임뿐이었다. 이른바 ‘한국을 빛낸’ 가수가 되면서, 그의 운신의 폭이 오히려 좁아져 버렸다. 거대한 미디어도, 열광하는 팬들도, 강남구청도, 혹은 싸이 자신도 키치 스타일로 기성의 체계와 도덕에 흠집이라도 내려는 음악을 실은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스타일로 상품으로 전화시켜 먹어치우는 문화자본의 왕성한 식욕은 싸이가 보여준 한 줌의 유희와 풍자 정도야 얼마든지 희화화의 상품으로 바꿔버렸다.

싸이는 틀림없이 뛰어난 퍼포머이자 기획자이며 마케터이자 싱어송라이터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된 정확한 무대 위에서 ‘본능적’으로 뛴다. 그에게 키치 혹은 B급 문화는 정교한 전략이면서도 동시에 아티스트로서의 본능적인 원천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상품으로서의 ‘키치’는 허용하지만 진짜 ‘불온한 키치’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성세대는 희롱과 유희와 풍자의 ‘진짜 키치’ 대신 국제적으로 상품이 될 수 있는 ‘한류 키치’를 원한다. 그리하여 키치 혹은 B급 대중문화가 내장하고 있는 최소한의 ‘목소리’마저 사라지고 ‘상품으로서 키치’만 남게 되는데, 그 증거가 다름 아닌 ‘강남 스타일’ 이후의 싸이다. 싸이는 ‘강남 스타일’에서 보여준 한 줌의 풍자와 키치적 해학을 수년째 반복해서 ‘재활용’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스스로의 성과를 스스로 갉아먹는 상태가 되고 있다. 쉼없는 자기 복제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반드시 저항성을 내장한 키치가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품으로서의 키치는 이렇게 자기 복제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당대성이 소거된 키치는 스타일의 변주 말고는 달리 보여줄 것이 없게 되는데, 당대성이 소거된 스타일의 변주란 결국 무대의상을 재빨리 갈아입는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코엑스 광장의 조형물을 바라본다. 저 조형물은 국가와 지자체가 앞장서서 일단 뭐라도 인기를 끈 것이라면 그게 뭐가 되었든 우선 분칠하고 포장해서 모든 것을 ‘문화상품’으로 팔아치우는 서푼어치 구경거리의 나라임을 생생히 증거한다.

나는 정녕 저 조형물을 싸이가 좋아할지 의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한 줌의 풍자도 독특한 유희 정신도 없는 ‘한류 스타’일 뿐이다. 그는 두 번 다시 ‘불온하고도 저속한 키치 정신’을 노래하지 못할 것이다. 굳어진 스타일 때문에 더러 그런 노래를 발표하고 과도하게 퍼포먼스를 할 수는 있으나, 조형물로 고착됨으로써 그는 그저 ‘세계를 빛낸 한류 스타’라는 공허하고 남루한 프레임에서나 ‘자유롭게 저항’할 것이다. 권력자와 구청장과 자본을 즐겁게 해주는 코믹한 유희, 돈이 되는 저항 말이다. 그것은 예술도 아니고 진정한 문화 콘텐츠도 아니다. 싸이가 자학적 풍자 정신으로 말한 ‘쌈마이’가 아니라, 진짜 ‘쌈마이’가 되는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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