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랴ZOOM] 고봉밥 먹던 한국인, 언제부터 밥그릇 작아졌나

진경진 기자 2016. 9. 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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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째 밥주던 식당, 스테인리스 밥공기 도입해 쌀 절약 나서

[머니투데이 진경진 기자] [솥째 밥주던 식당, 스테인리스 밥공기 도입해 쌀 절약 나서]

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시대가 바뀌면서 밥그릇 크기도 변했다. 사람 얼굴만한 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쌓아 먹어도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그보다 몇배는 작은 그릇에 먹어도 밥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용을 목적으로 밥을 줄이거나 쌀 외에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이 많아졌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정부의 노력(?)도 있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쌀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1950년대, 쌀을 절약하자는 의미에서 전국적인 '절미운동'이 펼쳐졌다. 초기에 캠페인 성격으로 시작된 절미 운동은 점차 단속을 강화하면서 강제성을 띄게 됐다.

절미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서울시였다. 서울시장은 쌀이 원료가 되는 술, 떡, 과자 등의 제조를 금지시켰고 이후 정부가 나서 쌀밥이 아닌 혼분식으로 식생활을 변화시킬 것을 장려했다. 혼·분식 운동은 보리, 콩, 조 등 잡곡을 섞은 혼식밥과 밀가루 음식먹기 등을 권장한 운동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쌀을 되도록 적게 먹는 것은 결과적으로 애국하는 길이 되고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일석이조 효과"라고 홍보했다.

매주 수·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로 지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을 원료로 하는 모든 음식 판매를 금지했다. 점심엔 탕이나 면류만 먹을 수 있었고 공공기관에선 백반을 팔 수 없었다. 가정에서도 '혼식'을 유도하기 위해 교사가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해 쌀과 보리의 혼합 비율(25%)을 확인했다.

식당에서 주는 공기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만해도 식당에선 양은솥에 밥을 해 솥째로 손님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절미운동과 함께 솥밥 판매를 금지시키고 대신 공기밥만 팔도록 한 것이다. 그릇 크기를 줄여 밥을 덜 먹게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정부는 양식이나 중국식을 제외한 음식점에 한해 '직경 10.5cm, 높이 6cm 크기의 밥공기에 밥을 5분의 4만 담아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이에 맞는 밥공기를 제공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재 음식점에서 사용하고 있는 밥그릇은 평균 직경 11.5cm 높이 7.5cm의 크기인데 여기에 담겨지는 밥의 양은 공기(새로 도입한 밥공기)로는 한그릇 반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때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처음 등장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손님이 밥을 더 요구할 땐 공기의 절반만큼만 더 줄 수 있었고, 그 이상을 요구할 땐 추가로 밥값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실효성이 적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솥밥을 제공해도 밥을 남기는 사람이 거의 없고 오히려 양이 적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밥을 추가로 더 달라는 사람들이 많아 기존보다 훨씬 많은 쌀이 든다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는 음식점 등에 적지 않은 벌금을 물리면서 제도는 자연스레 정착했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에는 쌀 생산이 크게 늘고 혼분식이 대중화되면서 절미운동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진경진 기자 jkj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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