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남자가 새해 첫날 명동서 떡국 끓인 이유

2010. 1. 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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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권지은 기자]

누리꾼들이 '베플 공약'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과 떡국을 나누는 모습

ⓒ 변준섭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과연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 생길까? 새해를 맞는 설렘으로 명동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1월 1일 '밀리오레' 앞에서 예상치 못한 볼거리를 발견했다. 알 수 없는 세 남자가 볼거리뿐만 아니라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와서 명동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한 사람은 끓인 떡국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다른 사람은 윷판을 벌였다. 또 다른 이는 뜬금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세배를 올렸다.

이상한 세 남자... 당신들, 대체 누구냐

이들이 새해 첫날 떡국을 짊어지고 명동에 나온 이유는 "네티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바로 '베플 공약' 때문이다. 최근 누리꾼들 사이에선 '제 댓글이 베플(베스트 리플의 줄임말)이 된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겠다'라는 댓글 달기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공약을 통해 누리꾼들의 공감을 얻은 댓글은 추천 수를 통해서 '베플'이 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베플 선거'에는 누리꾼들의 온갖 공약들이 난무한다. "제가 만약 베플이 된다면 신도림역에서 스트립쇼를 하겠습니다", "제가 만약 베플이 된다면 군대를 두 번 가겠습니다" 등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지거나 꺼림칙한 일을 하겠노라며, 너도 나도 자신의 댓글을 '베플'로 추천해 줄 것을 호소한다.

물론 누리꾼들이 이런 '댓글 놀이'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재미' 때문이다. 상상해봤을 때 '사람이 어떻게 저런 일을!'하며 감탄 섞인 웃음이 나오는, 보다 재미있을만한 선언들을 늘어놓고 직접 작성하면서 웃고, 남의 댓글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웃는다.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러한 베플 공약이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리플이 베플이 된다면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 한복판에서 삼겹살을 굽고, 노래를 부르고, 탬버린을 치겠다"는 댓글로 베플에 선정됐던 세 사람이 정말 '그렇게' 한 것이다.

이들과 관련해서 여러 언론들의 보도가 잇따랐다. 관련 기사가 떴고, 그 기사 밑으로는 누리꾼들의 '댓글 놀이'가 또한 어김없이 진행됐다.

인천에 사는 변준섭(24)씨는 "제가 베플이 되면 1월 1일 친구와 함께 명동에서 떡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의 댓글 위로 의정부에 사는 김반석(24)씨와 안산에 살고 있는 홍승현(21)씨가 자신들의 댓글을 연이어 달았다. "제가 베플이 되면 떡국 만드시는 분들 옆에서 여자친구와 윷놀이를 하겠습니다"와 "저는 저분이 떡국 만들고 윗분이 윷놀이를 하면 옆에서 세배를 하겠습니다"로. 세 사람은 염원대로 당당하게 베스트 리플에 선정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명동에서 만났다.

'베플러'들의 공약 지키기 위한 노력

"제가 베플이 되면 1월 1일 친구와 함께 명동에서 떡국을 만들겠습니다."

ⓒ 변준섭

변준섭(24)씨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장소를 섭외하고, 이벤트가 열릴 공간과 시간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공지했다. 지인들은 물론 낯선 누리꾼들까지 '정말로 하는 거냐', '못 말리겠다'라고 하면서도, 응원 섞인 댓글들로 명동 새해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물론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명동 길거리에서 떡국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줄 계획이었던 준섭씨는 구청으로부터 '떡국 조리 불가'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떡국을 다른 곳에서 조리해 길거리로 가지고 오는 걸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근처 교회에서 허락을 받고 세 사람은 떡국 15인분을 만들었다. 또 길거리에 버너와 냄비를 놓고 계속해서 떡국을 끓이다보니 떡국은 계속해서 '쫄고, 타고' 해댔다. 하지만 준섭씨는 "시민들은 떡국이 맛있다고 했다"면서 떡국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벤트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진행됐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변준섭씨는 두 시간 동안 시민들과 떡국을 나누었고, 김반석씨는 여자친구와 윷판을 벌여 시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이 쑥스러워해 홍승현씨가 세배를 올릴 곳(?)이 애매해졌지만 그래도 새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이들에 대한 시민들의 응원과 기대는 꽤 뜨거웠다.

10~20명 가량의 누리꾼들이 변준섭씨의 공지를 보고 일부러 직접 명동을 찾아 주었고, 어떤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며 목도리와 손난로를 주고 갔다. 세 사람은 '협찬'까지 받았다. T의류회사로부터는 옷을, 잠실에 있는 D떡집에서는 떡국을 만들 때 쓸 떡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

국민과의 약속, 제발 좀!

"제가 베플이 되면 떡국 만드시는 분들 옆에서 여자친구와 윷놀이를 하겠습니다."

ⓒ 변준섭

"처음에는 저도 물론 장난으로 댓글을 작성했어요. 그런데 누리꾼들의 추천으로 '베플'이 되니까 부담도 느껴졌어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기분이 좋았죠. 그래서 책임감을 가지고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변준섭씨는 인터넷 공간에서 추천(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베플(당선)이 되었고, 결국 스스로 내 건 공약을 직접 실현해보인 셈이 됐다. 몇몇 정치인들은 누리꾼을 '익명'으로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는 '가상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실명'으로 올린 공약을 지키는 '책임감'을 보였고, 이것은 명동이라는 '현실'공간에서 일어났다.

준섭씨는 정치인들이 이제 국민들과의 약속을 '제발 좀' 지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당선이 됐다는 건, 공약을 지키겠다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정치인들은) 막상 당선이 되면 (공약대로) 안 하잖아요. 선거 때 당선이 되고 안 되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제발 국민과의 약속을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세 누리꾼은 시민들에게 '재미'도 주고 '약속'도 지켰다. 정치인들은? 여기까지만 보면 누리꾼에게 2:0으로 패했다. 지방선거가 있는 올해부터는 정치인들이 공약을 지키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부디 누리꾼들을 드라마틱하게 역전하길 소망해본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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