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영웅을 기리는 조각상을 세우려면

박효종 2011. 1. 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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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박효종]

박효종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나라라는 것은 현재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즉흥적인 하루살이 공동체는 아니다. 눈이 쌓여 눈썰매장이 되듯, 과거가 쌓여 현재를 이루는 연속성의 공동체가 나라다. 그렇기에 과거에 흘린 피와 땀이 진하면 진할수록 현재가 풍요해지고 더 큰 결실을 누리는 법이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가 흘린 피와 땀이 실개천을 이루고 그들이 모여 도도한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것, 바로 그것이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던가. 현재를 살아가며 과거에 대해 엄숙하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공동체를 위한 죽음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어떤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흘린 눈물과 땀도 소중하지만, 목숨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위한 용기 있는 죽음에 대해 흘러간 물처럼 잊고 삶의 새로움만 반기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태도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옛 죽음을 기억하며 그 위에 미래를 설계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살아있는 자의 도리다. 지난해만 해도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천안함의 용사, 연평도의 용사, 한주호 준위, 이태석 신부 등이 그들이 아닌가.

 일찍이 미국의 시인 아치볼드 매크리시는 이렇게 읊조렸다. "우리는 모르네. 우리의 삶과 죽음이 평화와 새로운 희망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헛된 것이었는지./ 우리의 죽음을 남기니, 부디 의미를 부여해 주오./ 우리는 젊지만 죽었답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오."

 그렇다.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 이들의 죽음으로 대한민국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임이 더욱더 분명해졌고 한층 더 성스러워졌으며 더욱더 튼튼해졌고 또 더욱더 따뜻해졌다. 이들을 위한 조각상을 세우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천안함과 연평도 용사, 이 준위와 이 신부야말로 영웅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고 백마를 타고 칼을 높이 들었던 천하무적의 초인적 영웅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죽음 앞에서 전율했고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나는 것을 못내 한스러워했던 보통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결단했고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보니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칼레의 시민'이 생각난다. '칼레의 시민'은 지금부터 650년 전 백년전쟁 당시 칼레를 위해 희생을 자원한 6인의 시민을 기린 조각상이다. 로댕은 이 조각상을 만들면서 기존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새겨 넣었다. 그들의 얼굴은 환희가 아니라 고뇌로 가득 차 있다. 공동체를 위한 죽음이라고 해서 자랑스럽게 미소를 머금고 죽어가는 환한 모습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와 영원한 이별 앞에 망연자실 떨고 있는 애잔한 모습이 고스란히 조각상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로댕은 또 이들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을 높은 데 두지 않고 일반 사람이 걸어 다니는 평지에 두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여느 동상처럼 높은 데 있어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게 돼 있는 조각상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차이인가.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기야 이들은 왕정시대의 영웅들이니,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끔 높은 데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시대의 영웅은 이와 같을 수 없다.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보통시민들로서, 낮은 데로 임할 수밖에 없는 영웅들이 아닌가.

 우리가 지난해 목격한 영웅들의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이었다. 천안함이건 연평도건, 바닷속이건, 아프리카 오지에서건 그들은 죽기 전 특별히 이름을 날린 존재도 아니었고 묵묵히 자신의 직책에만 충실했던 '무명의 시민' '무명의 전사' '무명의 성직자'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심심 산골짜기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으면서 공동체의 영웅으로 활짝 피어났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자 목숨을 버렸다가 환생한 심청이처럼 연꽃 속에 부활했다. 바로 이것이 이들을 위한 조각상을 만들어야 할 이유다.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따뜻하고 든든하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삶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조각상을 만들 때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느꼈을 전율과 고통스러운 얼굴이 그대로 그려져야 하고 또 우리와 꼭 같은 크기의 모습으로 높은 데가 아닌 평지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방식이 아니겠는가.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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