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강제병합 100년] <19>식민지 욕망의 전장, 명월관

2010. 6. 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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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요릿집'에서 근대 대중문화·항일정신이 분출했다궁중 여악 담당했던 예기들 일자리 잃고 명월관 진출일제의 창기 대우에 저항… 동맹 폐업·애국지사 지원민족대표들 3·1운동때 명월관 분점서 독립선언서 낭독

덧없거나 혹은 껄끄러웠기 때문일까. 지금 이 땅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의 '밤 문화' 현장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장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땅을 팔아서라도 명월관 기생 노래를 들으며 취해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던, 식민지 남성들의 로망이었던 명월관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질탕한 밤의 풍경을 대낮의 이성이 눈감아줄지언정, 애써 보존하거나 기념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명월관으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의 이른바 '기생 요릿집'은 식민지시대 상류층의 적나라한 욕망의 전장(戰場)이었다. 일제가 심은 욕망의 문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곳이면서 그곳에서는 저항과 전통의 계승, 변화의 몸부림도 또한 치열했다.

독립선언 유적지에 남은 흔적

1903년 명월관이 처음 문을 연 곳은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일민미술관 자리. 1919년 이곳이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옮겨간 곳이 종로3가 단성사 맞은편의 피카디리극장 자리다. 명월관은 1907년 세워진 단성사와 함께 당시 경성 북촌의 유흥 중심지로 경성의 밤을 밝혔으나 이곳 역시 한국전쟁 때 화재로 없어졌다.

명월관의 흔적을 그나마 볼 수 있는 곳은 인사동 태화빌딩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다. 지난 6일, 종로타워 오른편의 작은 골목을 지나 태화빌딩으로 갔다. 일요일인 탓에 거리는 한산했으나 빌딩 앞에서는 10여명의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자리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후 금세 자리를 떴다.

이 역사적 장소가 하필이면 기생 요릿집이었다. 태화빌딩은 당시 잘 나가던 명월관이 새로 낸 분점인 태화관 자리다. 표지석에도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라고 기록돼 있다. 독립선언 장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없지 않으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당시 대형 요릿집은 삼엄한 일제의 경계를 피해 민족대표들이 회합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며 "향락과 음모의 한편에서 독립을 위한 밀의도 펼쳐졌던 이중적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조선 요릿집에 불어온 바람

명월관의 등장은 조선 요릿집의 일대 혁신이었다. 씻지도 않은 대젓가락을 쓰던 볼품없는 밥집밖에 없던 당시, 1912년 매일신보는 '그러한 時(시)에 신식적, 파천황적, 청결적, 완전적의 요리점이 황토현에 탄생하니, 조선요리점의 비조 명월관이 是也(시야)라'며 극찬했다. .

명월관을 세운 안순환은 궁궐에서 궁중요리를 차리고 연회를 베풀던 궁내부 주임관(奏任官) 겸 전선사장(典膳司長) 출신. 망해가던 궁궐에서 나온 그는 고종이 즐겨먹었다는 냉면을 비롯해 조선 정통의 궁중요리를 시중에 선보였다. 물론 명월관의 주역은 기생들이었다. 노래와 춤을 겸비하고 궁중 여악을 담당했던 예기(藝妓)들이 궁에서 일자리를 잃고 요릿집으로 진출한 것이다. 1908년에는 이들의 발을 묶었던 관기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임금이 즐기던 음식과 꽃다운 기생들의 가무를 민간인도 돈만 내면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본 요정의 모방, 이식된 밤 문화

조선 요릿집의 비조는 그러나 게이샤를 중심으로 음식과 가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던 일본 요정(料亭)을 본뜬 것이기도 했다. 1895년 러일전쟁 후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던 혼마치(本町ㆍ지금의 충무로 일대)에는 '화월' '국취루' 등 일본 요정이 번성했고 여기에는 식민지에서 한밑천 잡을까 하고 온 왜각시들도 득실댔다. 이 일대 일본 요정은 일본 고위관료나 상업계 인사, 친일파들이 수탈한 돈을 흥청망청 써대는 주지육림의 장이었다.

친일연구가 고 임종국의 표현을 빌면 일제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 아니라,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에 따르면 기생들을 무더기로 불러다 놓고 일대 일로 옆에 앉아 술을 따르게 한 것도 일본식이라 한다. 이 일본식 기생문화는 1960~80년대 한국 요정정치의 원형이면서, 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유흥문화에 드리워져 있는 트라우마다. 일제는 지금의 묵정동 및 용산 일대에 서민 대상 홍등가도 만들었는데, 그때 만들어진 공창가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집창촌의 근원이다.

일제가 조장한 성적 방종에다 생계 유지의 부담, 여기에 창기(娼妓)마저 기생을 자처하는 상황 때문에 기생들의 지위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昔日(석일)의 기생은 비록 賤業(천업)을 할지라도 예의와 염치를 尙(상)하더니 今日(금일)의 기생은 但(단)히 금전을 숭배한다. 소위 賣唱不賣淫(매창불매음)이라는 전래의 語(어)는 名詞(명사)까지 업서지게 되얏다'('개벽' 1924년 6월호)는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저항과 계승, 새로운 문화의 태동

갈수록 기생을 천박하게 보는 시선이 늘어났지만, 간과해선 안될 것은 기생들의 대응이었다. 무엇보다 전통 여악의 계승자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창기와 다름없이 대하는 일제의 성병 검진을 치욕으로 느끼며 동맹 폐업에 나설 정도였다. 3ㆍ1 운동 무렵에는 독립 의식에도 눈을 떠, 경시청 간부가 '모두가 살아있는 독립격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애국지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의기(義妓)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을 소실로 삼으려는 친일파를 향해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말했다는 기생 산홍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인 백석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다가 길상사를 세운 고 김영한(기명 김진향)도 이른바 '명월관 문학 기생' 출신이었다. 그들은 또 막 태동한 레코드, 라디오, 영화 등 근대적 매체로도 진출해 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며 대중문화의 길도 열었다.

기생들은 1927년에는 잡지 '장한(長恨)'을 창간해 당대의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창간호에서 김록주는 기생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를 악마라는 자는 우리보다도 몇 배 더 악마더라… 거짓과 아첨으로 사는 이 세상을 우리는 정직하게만 살려고 하니 우리가 성공은 고사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정한 이치가 아니냐."

명월관도, 기생이란 존재도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 가감 없는 욕망의 출구에서 좋든 싫든 참으로 많은 것들이 태동했던 셈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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