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장의 '머슴농사' 의혹 사건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0. 3. 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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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청장 부인 소유 땅에서 구청 공공근로 직원들이 대신 농사를 지어줬다는 이른바 '머슴농사' 사건이 불거졌다. 주민이 낸 세금이 현직 구청장 가족 땅 농사를 위해 스였다는 점에서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성토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MBC가 지난달 반론보도를 내보내면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의혹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시사IN은 구청장 부인 땅에서 농사를 직접 지었다는 증언자를 취재했다. 머슴농사 의혹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늦겨울인데도 잡초를 막기 위해 이랑마다 덮어놓은 비닐은 그대로였다. 비닐을 들춰보니 그 안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밭 옆에 있는 창고 안에는 쓰다 남은 비료며 삽·곡괭이 따위가 어지럽게 방치돼 있었다. 인적이 끊긴 지 여러 달 되어보였다.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396-2번지. 신숙주 선생 묘 부근의 한적한 시골마을인 이 일대 3천900여㎡(1200평) 땅은 지난해 몸살을 앓았다. 현직 강북구청장 부인 소유인 이 땅에서 구청 소속 일용직원들이 대신 농사를 지어줬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MBC의 반론보도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실은 강북구 지역 신문들.

발단은 지난해 11월23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였다. 이날 뉴스데스크는 "서울의 한 구청(강북구청)에서 인부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켰는데, 알고 보니까 구청장 부인의 땅에서 일을 시킨 사실이 드러났다"라고 보도했다. 뉴스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인부의 증언과 함께 인부를 나른 트럭이 강북구청 것임을 내보냈다. 지역은 발칵 뒤집혔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3선 도전에 나설 것이 확실한 김현풍 구청장이 연관된 사안인 만큼 여론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지역 야당은 '공공근로자를 제집 밭일에 부려먹은 한나라당 구청장은 즉각 사퇴하라' 등의 내용이 적힌 현수막을 지역에 내걸었다.

강북구청의 해명은 이 땅이 구청 '양묘장'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MBC 보도 이튿날 김현풍 강북구청장은 "강북구의 나무보관 장소가 부족해 2007년부터 구청에 땅을 무상으로 빌려줬다. 농사 일은 인부들이 자투리땅을 이용해 알아서 한 것이고, 구청이 지시한 적은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뒤에도 MBC 뉴스는 구청 직원이 밭에서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현장을 포착한 화면 등을 내보냈다. '의혹'이 점점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훨씬 지난 2월6일, MBC는 아침 뉴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반론보도'를 내보냈다. '강북구청장 부인 소유의 밭은 강북구청장이 강북구에 양묘장으로 사용하도록 빌려준 땅임이 밝혀져 알려드립니다. 또한, 강북구청은 구청장의 지시로 공공근로자들로 하여금 의정부 밭에서 농작물을 경작하게 한 사실은 없었다고 밝혀왔습니다.'

사태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반론보도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신문들은 'MBC 보도 사실무근' 등의 제목을 단 1면 머릿기사를 내보냈다. 지난해 11월 보도 이후 강북구청 측이 언론중재위 등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결과 나온 것이었다.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강북구청장 부인 소유의 땅. 농사용 비닐이 아직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MBC 보도국 간부는 "양묘장으로 사용했다는 구청 측 주장을 내보내지 못한 점 등 때문에 반론보도를 수용했다. 소송으로 가면 서로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MBC 관계자는 "우리가 구청 측과 합의해 정정보도가 아닌 '반론보도' 수준의 합의를 했음에도 구청과 지역신문이 'MBC 왜곡보도' 운운하길래 이를 취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청 측이 담당 기자에게 사과의 뜻을 밝혀와 취재를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애초에 이 사건을 MBC에 제보한 건 진보신당이었다. 최선 강북구의원(진보신당)은 지난해 초 구청 공공근로에 참여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내용을 전해듣고 관련 사실 파악에 나섰다. 이후 내부고발자로부터 의정부 땅에 농사를 지으러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지난해 9월 인부들이 농사를 짓는 현장을 촬영해 MBC에 제보했다. 이 과정에서 최선 의원은 구청이 관 내외에 임대하고 있는 땅이 있는지 질의했고, 구청으로부터 그런 곳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강북구청이 제시한 토지사용승낙서. 이 문서에서 3년 전 인주가 묻어나와 논란이 됐다.

그런데 MBC 보도가 나간 직후 강북구청 측은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2006년 12월 강북구청이 구청장 부인 조아무개씨와 맺은 '토지사용승낙서'였다. 임대 기간은 2007년부터 2009년 말까지였다. 구청 측은 최선 의원이 임대 땅 현황에 대해 질의할 때 이를 제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무상'으로 임대한 땅이어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이 문서가 나타나면서 의정부 땅이 양묘장이라는 강북구 주장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곧바로 논란에 휩싸였다. 3년 된 문서에서 '인주'가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민주당 김동식 의원은 구의회 행정감사에서 강북구 도시관리국장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김동식 강북구 의원 : (중략) 제가 휴식시간에 잠시 확인해 본 결과 (문서에서) 3년 전에 찍은 도장의 인주가 묻어나왔다는 것은 국장님, 인정하십니까? 아까 조금 전에 휴식시간에 확인한 내용이오.

강북구 도시관리국장: 예, 인정하고 있습니다.김동식 의원 : 과장님, 아까 인주가 묻어나온 것은 확인됐지요?공원녹지과장 : 예. (강북구의회 속기록 발췌)헌데 어찌된 일인지 김동식 의원은 여기서 관련 질의를 그치고 만다. "제가 파악할 부분은 아니다"라는 게 김 의원의 말이었다. 김 의원은 < 시사IN > 과의 통화에서 "3년 전 문서에서 인주가 묻어나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됐다. 의회 차원에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전문가를 통해 검증하려 했으나 한나라당 구의원들이 조사위 구성을 부결시켜서 일이 안됐다. 결국 내가 힘이 없어서 못 한 거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북구 의회는 지난해 12월8일 '강북구청장 부인 토지 공공인력 사적활용 진상규명을 위한 행정사무조사 특별위원회' 요구 건을 부결시켰다. 내심 부결을 원한 건 한나라당일테지만, 민주당 소속 한 의원 역시 기명투표 대신 무기명 투표 방식에 찬성해 특위 구성을 부결시키는 데 일조했다. 토지사용승낙서를 보관하고 있는 강북구 공원녹지과 담당자는 인주 논란에 대해 "요즘은 인주 품질이 좋아서 10여년 가까이 지나도 인주는 묻어나온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토지사용승낙서 논란이 잦아들자 강북구는 전방위적인 역공에 착수했다. 12월18일에는 MBC 보도를 반박하는 자체 동영상까지 제작해 구청 간부 및 도시관리공단 직원들에게 상영했다. 구청 측은 8분 15초짜리 동영상을 통해 토지사용승락서 등을 제시하며 MBC 보도가 대부분 왜곡됐다고 반박했다. 구청 측은 또 당시 차량운행일지를 제시하며 의정부 땅에서 일상적인 양묘 작업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김현풍 구청장은 동영상을 통해 이렇게 해명했다.

'수천만원의 임대료를 절감하려는 강북구청의 좋은 취지가 방송 보도로 훼손됐다. 우리 강북구 업무를 돕고자 추진한 일이 왜곡돼 알려짐으로 해서 당혹스럽고 억울한 마음이다. 우리 강북구는 도로 확·포장, 공원조성 등 주민 기반 시설 공사할 때 가로수나 공원에 있는 나무를 이식할 장소가 없어 실무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예산의 낭비 또한 많다는 이야기를 해당 실무자에게 들었다. 마침 근거리에 배우자 소유 토지가 있어 업무 추진 어려움 해소와 예산 절감 차원에서 개인 소유 토지를 무상으로 강북구에 임대하기로 결정해 해당부서에서 사용키로 한 사실이 있다. 나무은행으로 사용한 후에는 해당 토지 관리를 공원녹지과에서 주관했다. 나는 토지 이용에 대한 세부적 내용은 잘 몰랐으므로 의회에서 답변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동영상에는 '양심 선언자'까지 등장한다. 구청 일용직 인부 강아무개씨가 그다. 강씨는 "우리가 일을 하다가 시간이 좀 남아 자투리땅에 농사를 지은 건데, 구청장님도 황당하실 것이다"라며 자기 '죄'를 실토한다. 구청 측은 수확한 농작물을 강씨 등 작업인부가 가져갔다고 주장한다.

의아한 것은 강씨가 올해 구청 공공근로 채용 과정에서 합격했다는 점이다. 구청 측 동영상대로라면 강씨는 근무 시간에 작업장에서 '과외 일'을 해 사익을 취한 자다. 명백한 근무 기강 해이임에도 신청자가 줄을 선 공공근로 채용에 다시 합격했다는 점을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구청 측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자가 구청 홍보과 담당자에게 강씨의 채용 문제를 문의하자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채용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뒤늦게 강씨 채용 사실을 파악한 뒤에는 "일하고 남는 시간에 한 일을 가지고 채용에서 탈락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라며 태도를 바꿨다.

공원녹지과 담당자도 "일용직 인부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림인데, 한 가지 잘못으로 자르는 건 가혹하다. 나름 내부 기준을 통과해서 채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근무 시간에 과외 일을 한 사람이 내부 채용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 담당자는 "그 일과 이 일은 분리해서 생각했으면 좋겠다"라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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