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의 습격.."이대론 죽음뿐" 절규
[한겨레] [현장] 청주 재래시장 12곳 4500여 가게 하루 문닫아대형마트 24시간 영업에 기업형 슈퍼 무차별 확산 시장
상권 빠르게 잠식 생존위기 몰린 상인들
"가게철시는 목숨 내논 의미 흡혈귀 영업 대책 세워라"
이날 시장엔 적막만 흘렀다
비가 그친 15일 새벽 충북 청주 육거리시장은 깨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가득 찬 손님과 물건, 호객과 흥정으로 시끌벅적했던 시장에는 적막이 흘렀다. 가게 문은 굳게 닫혔고, 시장 안 수레점포와 좌판도 천막으로 꽁꽁 싸여 있다. 의류점 골목에서 만난 류창열(71)씨는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를 빼고 40여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게를 열었는데,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충북상인연합회, 청주재래시장연합회 소속 상인들은 이날 하루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육거리시장을 포함해 청주지역 모든 재래시장(12곳)의 가게 4500여곳이 문을 닫았다. 뜨내기 좌판 상인을 뺀 시장 상인 대부분이 참여했다. 1967년부터 장사를 해 온 육거리 ㄱ설렁탕 등 시장 주변 식당과 약국 등도 '철시 투쟁'에 동참했다. 박영배(58) 충북상인연합회장은 "장사꾼들이 가게를 닫는 '철시'는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의미"라며 "생존 위기에 몰린 상인들의 마지막 절규"라고 말했다. 하루 장사를 접은 상인들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홈플러스 청주점 앞에서 대형마트 규탄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충북경실련 등 충북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꾸린 '충북민생경제살리기운동'과 주부, 소비자 등 1000여명이 참여했다. 청주수퍼마켓협동조합 소속 동네슈퍼 40여곳의 상인들도 문을 닫고 집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철시 시위'에까지 나선 배경에는 대자본의 24시간 영업, 기업형 슈퍼마켓(SSM)과 대형마트들의 무차별적인 확산 때문이다. 청주에는 매장 면적 3000㎡ 이상 대규모 점포가 이미 7곳 들어서 있다. 여기에 지난달 청주시와 벌인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ㄹ산업이 청주시 비하동에 대형마트를 개설하면 인구 65만여명인 자치단체에 대규모 점포 8곳이 들어서게 된다. 이와 함께 홈플러스 청주점이 지난 5월1일부터 24시간 영업을 시작한 데 이어 기업형 슈퍼를 금천동 등 6곳에 잇따라 개점하면서 동네 상권을 잠식하고 있다.
상인들은 이날 집회에서 홈플러스 청주점의 24시간 영업 철회, 기업형 슈퍼의 무차별 확산 방지 및 대책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은 대규모 점포들의 공세가 멈추지 않으면 오는 17일 청주세무서에 사업자등록증까지 반납할 계획이다. 상인들은 '대형마트로 지역경제 잠식하고, 에스에스엠으로 골목상권 씨말린다' 등의 펼침막을 들고 2시간 남짓 집회를 벌였으며, 집회 뒤에는 홈플러스 주변에서 거리시위도 벌였다. 충북도 경제정책과 박원춘씨는 "대형마트는 인구 15만명 당 1곳 정도가 적당하지만 청주지역은 너무 많은 대형마트가 들어선 게 사실"이라며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고춘례(70·여·육거리시장)씨는 "50년을 시장에서 과일 팔아 육남매를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면서도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정말 장사가 안 된다"며 "돈 많은 기업들이 상인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푸념했다. 박명수(48·사창시장 떡집)씨는 "중소상인들의 아픔을 꼭 알려야겠다는 마음에서 난생처음 집회에 나왔다"며 "정부와 국회, 대기업들이 죽을 고비를 맞은 상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김기형 홈플러스 청주점 부점장은 "24시간 영업과 점포 개설 등은 고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철회할 뜻이 없다"고 말했다.
이두영 충북경실련 사무처장은 "대형마트에 기업형 슈퍼까지 대기업 자본의 대규모 점포들은 동네 상권을 빨아 삼키는 흡혈귀 같다"며 "정부와 국회가 유통산업발전법 등으로 완충지대를 만들어 무너진 지역 상권과 생존권 위협을 느끼는 중소상인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주/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 한겨레 >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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