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힘든 사연 보듬어 줘야죠"

2009. 1.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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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청소년 돕는 임천숙씨8년째 '미용실 쉼터'… 숙식 제공하며 엄마役"아이들 상처 없도록 편견 사라지는 새해 되길"

"이모, 제 엄마 해주면 안돼요?" 임천숙(35)씨가 종종 듣는 말이다. 그는 거절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아이를 뒀다. 배 아파 낳은 건 세 자매뿐이지만 그를 엄마처럼 여기고 따르는 아이들은 지난해에만 150여명을 헤아렸다.

임씨의 수첩에는 아이들 이름과 가족관계, 연락처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다. 하지만 보지 않고도 아이들 사연을 줄줄 외운다. "민수는 할머니와 둘이 살아요. 지은이는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지 않고 욕만 하죠. 현진이는 학교 그만두고 횟집에서 일하고…."

동근(16)이도 그 아이들 중 하나다. 지난해 5월, 동근이는 단 둘이 사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학교를 그만 두고 가출했다. 길에서 자고 굶기 일쑤였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이때 동근이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와 잠자리, 이보다 더 따뜻한 말을 건넨 이가 임씨였다.

그의 설득과 따끔한 충고 덕에 동근이는 올해 3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이모는 천사예요. 제 삶의 은인이고요. 앞으로 멋진 요리사가 돼 제일 처음 만든 음식을 이모한테 대접할 거예요."

가출 청소년들을 보살핀 지 8년, 그동안 임씨를 만난 수많은 아이들이 집과 학교로 돌아갔다. 구치소에서 그가 넣어준 책을 보고 감동해 출소 후 회사원이 된 친구도 있고, 대학에 진학해 나중에 위기 청소년을 돕는 임씨의 뒤를 잇겠다는 아이도 있다.

임씨가 운영하는 미용실이 있는 경북 구미시 황상동 중앙시장 안 낡은 상가건물의 2층. 임씨와 세 딸이 사는 방과 부엌까지 포함해 18평 남짓한 이 곳은 해가 지면 '집'을 찾아온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밥을 먹고, 잠도 자고, 임씨에게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이들은 "엄마보다 좋아요. 저희들을 이해해 주니까요"라고 입을 모은다.

임씨가 이 일을 시작한 데는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깔려있다. "집이 없었어요.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는 저희 자매에게 소매치기를 시켰죠. 차라리 누군가 고아원에 데려다 주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그 뒤에도 식모살이 하는 엄마를 따라 남의 집을 전전했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렵게 미용사가 되고 가정도 이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져 사채업자들에게 딸들까지 위협 당하게 되자, 고심 끝에 2년 전 남편과 헤어졌다.

신용불량자인 임씨에게는 여전히 빚이 적지 않다. 미용실에서 번 돈은 월세 내고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가출 청소년들과 나눠 먹는 쌀과 라면 따위는 모자(母子)가정 수급자에게 지원되는 것들이고, 옷도 단골 손님들이 가져다 준 헌 옷으로 버틴다.

이런 형편에 그 많은 아이들 돌볼 마음이 어떻게 생겼을까 싶다. "대단한 일 아니에요.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누는 거죠. 제가 힘들 땐 아이들이 절 위로해줘요. 애들을 제 곁에 두면 더 크게 엇나가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해요."

임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빚도, 가난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이다. 사정도 모르고 "저 여자, 애들 데려다 나쁜 짓 가르친다"고 쑤군대는 사람들도 있고, 한 번은 주민의 신고를 받고 밤늦게 경찰이 찾아온 적도 있다.

그 자신은 당당하지만 딸들이 상처 받는 것이 가슴 아프단다. 그는 "우리가 모자가정이어서, 사람들이 더 편견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의 새해 소망은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편견이 줄면 그의 미용실을 찾는 아이들이 상처 덜 받고 바르게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저 아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자신이 활동하는 '1388청소년 지원단'의 심리검사 분석, 미술심리치료 등 교육과정에 등록, 공부하고 있다.

최근 자신과 같은 모자가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달라고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주위에선 대통령이 읽기나 하겠냐고 비웃지만, 매달 편지를 보내고 얼마나 달라졌는지 매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아직도 새 학기면 눈 감고 엄마나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는 선생님이 있어요. 어른들이 먼저 편견을 버리고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구미=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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