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칼럼] 한국인, 정말 보수적인가

2008. 5. 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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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필자가 자주 들어온 말 중 하나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한국은 보수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한국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학교에서 매일 반공 이념을 배우며 규율화된 사회에서 자랐고 또한 경기추세에 민감한 자영업자들이 많은 사회이다 보니 보수성이 짙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학교나 보수언론에서 받는 보수적 가치에 치우친 '이념 세례'까지 생각하면 '보수적 사회' 가설에 힘이 더 실리게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정말 고질화된 '보수적 사회'였다면 과연 오늘과 같은 지속적인 촛불집회들이 가능했을까?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을 초고속으로 밀어붙이려는 이명박의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진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현실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시장 현실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느라 세계 최장 시간 세계 최강의 템포로 노동하는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 눈을 시장 영역에서 정치 영역으로 돌릴 만한 최소한의 여유도 갖지 못한다. 그들이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정치의식화할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해 왔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촛불집회를 노동시장에 진출하지 않은 10대들이 주도한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등 진보 정당들의 지지율이 다 합쳐도 고작 10∼15%밖에 되지 않음에도 진보정당과는 거리가 먼 비지지자들까지 기존의 보수적 제도들을 깊이 불신하고 사회생활 패턴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진보 이념이 아직 충분히 대중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의 불신이 더 적극적인 저항으로 표출되지는 않고 있지만, 경기 하강 국면이 본격화돼 장기적인 침체와 민생 파탄의 가속화로 이어질 경우 이들이 진보의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이른바 '조·중·동', 즉 보수 언론의 지지를 업고 등장했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영향력은 과연 절대적으로 큰 것일까? <조선일보>는 판매부수 1위이지만, 4년 전 국내의 한 여론조사 결과 이 신문을 가장 신뢰한다고 밝힌 응답자는 8.9%에 불과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도는 아예 5.1%로 나타났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 조사에서, 신문보도에 대한 한국인의 종합적 신뢰도는 64%에 불과해 미국(81%)이나 영국(75%), 독일(80%)보다 훨씬 낮았다. 타성적으로 읽기는 읽지만 보수언론에 대해 경험적으로 사익추구 집단으로서의 실체를 파악한 것이다.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10대들은 '조·중·동' 영향권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조·중·동'이 열심히 밀어주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며칠 전 세계여론네트워크가 벌인 여론조사 결과 한국 정부를 신뢰하는 한국인들의 비율은 18%에 불과했으며, 특히 30대에서는 4.5%에 불과했다. 이는 조사 대상국 중 최저 수준의 정부 신뢰도다. 비록 진보적 이념을 갖지 못해도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지배자들을 '성공한 도둑'으로 보고 있다. 단, 그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그동안 '통일·민족' 등 거대 담론에 지나치게 매달려 대중을 오만하게 '계몽'하려 했던 운동권식의 '진보'는, 제도권에 거듭 실망하면서도 바깥의 대안을 찾지 못한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재분배형, 복지형 국가로 전환하는 청사진(로드맵)을 제시하는 등 구체성과 현실성 있는 진보로 나아간다면 가까운 미래에 민심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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