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 벗기고 억지 국가부르기.. 프랑스 맞아?

입력 2010. 2. 21. 10:13 수정 2010. 2. 2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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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경미 기자] 사르코지 정부가 갑자기 아랍인 배치에 나선 이유

경제 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국경을 점점 잠식하고 있는 오늘날, 가장 '프랑스다운 것'은 무엇이고 '프랑스인'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년 11월 초부터 프랑스 정부가 뜬금없이 '국가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들고나와 프랑스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홍보활동에 들어갔다. 더불어 사르코지 대통령이 임기 초기에 창설한 이민부가 활발한 활동에 들어갔다.

▲ 이슬람여성

히잡을 쓴 이슬람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다. 이슬람사회에서는 여성의 얼굴과 몸을 히잡이나 챠도르로 가리도록 하고 있다.

ⓒ 백찬홍

그런데 프랑스다운 것과 이민부의 활동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선 프랑스다운 것을 규정하기 위해선 프랑스답지 않은 것, 낯설은 것, 이방인, 외국인, 이민이란 연상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민부 활동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가 지난 3개월 동안 국가정체성이란 대국민토론의 구체적인 실행책으로 제안한 사항들은 아래와 같다.

▲ 아랍 여자들의 히잡 착용 금지 ▲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고 교실에 1789년 프랑스혁명 인권선언문을 붙일 것 ▲ 학생들은 1년에 최소한 한 번 < 라 마르세이유 > 국가를 부르도록 할 것 ▲ '젊은 시민 수첩'을 만들어 학교에서의 애국교육을 강화 ▲ 외국인들의 접대와 통합 강화 결국 국가정체성이란 안건 뒤에는 외국인, 특히 아랍인 배척이라는 주제가 숨어있는 셈이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왜 갑자기 아랍인 배척을 강조하고 나서는 것일까?

해답은 오는 3월 열리는 지방선거에 있다. 사르코지 우파 정부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극우파인 FN(국민전선)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정체성을 들고 나온 것이다. 우파와 극우파가 합세해서 좌파를 보다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작전인 셈이다. 11월 초에 시작되어 2월 말에 끝나도록 되어있는 이 프로그램의 시기만 보아도 3월의 지방선거를 맞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파리의 한 고등학교 건물.

ⓒ 한경미

다른 고양이 때릴 일이 더 많은 프랑스인들

그러나 많은 프랑스인들은 국가정체성이란 주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먹고 살기에도 힘든 이 시점에 이들은 '다른 고양이를 때릴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재미있는 프랑스 표현은 다른 더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을 때 프랑스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월급 인상이 물가상승을 따라 잡지 못해 삶의 질이 눈에 띄게 낮아져가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가정체성 대토론은 아닌 것이다.

이미 토론 초기인 11월 초에 한 프랑스 시민은 AFP통신에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많은 프랑스인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이 시점에서 거액의 자금과 상당한 양의 시간을 들여 국가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앞에는 입에 풀칠해야 할 더 급한 문제들이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답이 뻔히 나와있는 주제를 거론하는 정부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프랑스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권 옹호에 있다는 것은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자국의 전쟁을 피해 프랑스에 도피해온 아프가니스칸 사람들을 추방시킨 에리크 베송(이민부 장관)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국가정체성을 들먹거리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사실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은 '자유, 평등, 우애'라는 세 단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전 세계에 '인권 보호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가 이제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이유로 인권을 팽개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당의 피에르 모스코비치도 이 토론을 '완전히 유해한' 것으로 규정했고 극우파 FN(국민전선)의 마린 르 펜 부총재도 "지방선거를 몇 개월 앞두고 우리 선거권자의 표를 잠식하려는 선거사기"라고 규정했다.

좌파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인들이 외국인 배척을 들고 나온 정부에 비판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지난해 12월 4일에는 < 리베라시옹 > 을 통해 20여명의 지식인들이 이민부 폐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체성이라는 대토론은 국민의 분열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야기시킨 결과만을 낳았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에게 이 구호는 '쇠 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말았고 대신 사르코지 대통령과 피용 국무총리의 신임도를 갉아먹는 현실을 가져왔다.

12월 5일 < 피가로 마가진 > 이 행한 여론조사에서 두 사람은 각자 3%P의 지지도를 잃어 사르코지가 34%, 피용이 36%의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탁상공론으로 끝난 토론... "산이 생쥐를 낳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 ITAR-TASS=연합뉴스

결국 지난 2월 9일 프랑소와 피용 국무총리는 국가정체성 대토론의 막을 내리는 결말 회의를 주재했다. 아무런 구체적인 실행책 없이 탁상공론으로 그친 이 토론을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은 "산이 생쥐를 낳았다"라는 표현으로 가볍게 비판했다. 엄청나게 커다랗게 무엇인가를 낳을 것 같았던 계획이 결국 생쥐라는 하잘 것 없는 것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각종 언론에서도 지난 3개월간 이루어진 국가정체성 토론은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혼동하는 심각한 혼란과 불화만을 야기했을 뿐이라고 토를 달았다.

'국가 정체성'이라는 토론의 대장정을 관심 없이 지켜본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은 2월 9일 < 르 포엥 > 지 독자의견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에리크 베송 이민부장관은 토론을 유지해 나갈 능력도 없어 피용 국무총리가 대신 나섰다.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 특히 예산을 낭비한 결과 얻은 것은 프랑스인들의 완전한 무관심이다. 이미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라는 제안, 프랑스가 처한 진정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 프랑스라는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아는지…." "국기를 달라고 하면 오히려 달린 국기를 내리고 국가를 부르라고 하면 오히려 국가에 야유 휘파람을 던질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은 어린 애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무엇이 우리를 다른 26개의 유럽국가와 구별하게 하는가? 우리는 프랑스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유럽인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우리의 현명한 선조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내 의견을 대신한다. ▲ 영국은 왕국이고 독일은 인종이며 프랑스는 개인이다.(쥘 미슐레) ▲ 선조의 영광을 찾는 것은 가지 위에서 찾아야 할 과일을 뿌리에서 찾는 것이다.(마농 롤랑) ▲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국기가 피와 똥으로 얼룩졌으니 이제는 국기라는 것을 아예 지니지 말아야 할 때다(귀스타브 플로베르)" 라이시테(정교분리)를 국가 원칙으로 걸고있는 프랑스라는 공화국에서 국가 대표가 지방선거의 표를 획득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의 분열을 조장시키고 이민자들 반대 편에 서게 만들려고 했던 이 토론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이 나버렸다.

국가정체성 대토론의 창시자인 사르코지 대통령은 자신의 예상과는 반대로 토론이 실패로 끝나자 2월 9일 피용 국무총리에게 토론의 폐장을 일임하고 자신은 샹젤리제에 있는 디즈니 스토어에서 쇼핑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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