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들여다보기]베일 벗는 정조 '논쟁 2라운드'
지난 2월9일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御札) 299통이 공개됐다. 편지를 통한 정조의 '막후정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어찰첩은 정조의 성격이나 정치 스타일에 대한 기존 해석을 뒤집는 놀라운 사료로 평가됐다. 하지만 이후 '정조 독살설'을 두고 잠시 논쟁이 붙은 것을 빼곤 본격적인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어찰첩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97년 4월11일자 편지. "요사이 벽파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성행한다고 한다. 내허외실(內虛外實)에비한다면 그 이해와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이렇게 한 뒤라야 우리 당의 광사(狂士)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들이 뒤죽박죽일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표시부분)벽파계 세력의 약화를 우려하면서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기존 인식과 달리 정조가 정국의 일원으로서 노론 벽파를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다음달 초 어찰첩의 해제 역주집이 나오고 관련 학술대회가 마련되면서 풀리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대출판부는 다음달 8일쯤 정조 어찰첩의 해제 역주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역주집은 어찰의 사진 도판과 탈초(脫草) 원문과 번역문, 해제 등을 실은 도록 크기의 책(20만원)과 원문과 번역문을 담은 보급판(3만원 내외) 2종으로 선보인다.
어찰 발굴과 분석에 관여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역주집 출간을 계기로 정조의 막후정치와 독살설 등 어찰첩 공개 당시 나왔던 주제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겠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사료를 분석하는 연구자들도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어찰을 왕조실록 등 다른 사료들과 비교하고 시대적 배경을 견줘보면 많은 것을 해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어찰 공개 이후 다른 사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면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에 따르면 어찰이 학자형 군주로 알려진 정조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수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안 교수는 "물론 정조는 밤 늦도록 책을 읽어 눈이 나빠졌을 정도로 공부에 열심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모습도 함께 지닌 복합적인 인물"이라면서 "일부러 당파들 간에 분란을 일으켜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면을 이끄는 등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동안 노론 벽파와 적대적 관계로 알려진 것도 비판과 견제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어찰 공개 후 논란이 됐던 '정조 독살설'도 역주집 발간을 계기로 실마리를 풀 수 있을지 관심이다. 이와 관련, 안 교수는 독살설이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조만간 '역사비평'에 발표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안 교수는 또 "이번 어찰에서 '뒤죽박죽' 같은 한글을 쓴 게 보이는데 다른 어찰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정조 어찰에 대한 논의는 역주집 발간에 이어 열리는 학술대회에서 좀더 구체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27일 개관되는 수원 화성박물관은 오는 6월 '정조의 비밀어찰에 나타난 정조의 정치운영'을 주제로 개관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안 교수와 김문식 단국대 교수 등 어찰 발굴과 분석에 관여한 이들을 비롯한 관련 전공자들과 함께 정치학자 등도 발제 및 토론자로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은 "지금까지 정조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온 측면이 있다"면서 "역사적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조의 국정 운영 스타일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어찰첩을 어떤 기관이 구입할지도 관심사다. 상당수 박물관이나 도서관이 어찰 구입 의사를 안 교수 등을 통해 소장자에게 전달한 상태다. 호사가들은 어찰첩의 가격을 30억원 정도로 보고 있다. 수원 화성박물관에 있는, 정조가 남인의 거두 채제공에게 보낸 어찰 9통의 구입가격이 통당 800만~1500만원이다. 이번 어찰첩이 299통이므로 단순하게 계산해도 24억원을 웃돈다. 웬만한 박물관의 1년 구입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다.
결국 향후 어찰첩의 귀착지는 소장자의 의중에 달려 있는 셈이다. 소장자는 어찰첩을 그 가치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관에 맡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안 교수는 "세인의 관심이 좀 사그라진 다음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소장자에게 전했다"면서 "연구자 입장에선 가급적 공공도서관에 보관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김진우·김재중기자 jwkim@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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