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통]"답답하다고요, 긍정적인 말만 하니 '해뜰날' 옵디다"
ㆍ데뷔 41년… 가수협회장 맡아 '희망전도사'로 나선 송대관
"10년 무명·지긋지긋한 가난 시달렸지만노래 제목과 가사는 마치 주문과 같아즐겁게 감사하며 사니 운이 따르더군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라며 '산장의 여인'을 노래한 권혜경은 외롭게 살다 가고, '완전히 새됐어'를 부른 싸이는 군대에 두 번이나 입대해 열심히 복무 중이다. 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렸고, 10년간 무명 가수였던 송대관은 1976년 '해뜰 날'로 인생에 해가 뜬 후 환갑이 지난 지금도 각종 공연은 물론 젊은층 대상 예능프로에도 출연 요청이 쇄도해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지난 10월 대한가수협회장에 취임해 어깨가 무겁고 송년 디너쇼 준비에 정신이 없다면서도 그의 표정은 밝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경제위기에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우울증 등 전국민의 가슴이 답답한 요즘, '해뜰 날'의 좋은 기운을 나눠받고 싶어 '희망전도사' 송대관을 만났다. 그는 "가수들이 노래가사 같은 운명을 살듯 우리들은 늘 긍정적인 말을 하고 작은 일에 감사하면 된다"는 법어 같은 말을 했다.
-가수협회장이 되셨는데 돈, 인기에 명예까지 혼자 다 가지면 너무 욕심이 많은 게 아닌가요.
"가수로 상은 많이 받았는데 가수생활 41년에 연예계쪽 감투는 쓴 적이 없어서 은근히 욕심을 내긴 했죠. 저도 굉장히 멋진 자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봉사하는 자리예요. 명색이 가수들의 대표인 회장인데 법인카드는커녕 한 달에 1500만~2000만원 정도 사비를 퍼부어야 합니다. 대한가수협회는 1959년에 출범했다 군사정부의 대중예술인 통제정책의 일환으로 통·폐합된 뒤 45년 만인 2006년에 사단법인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초대 회장은 남진 선배고요. 가수들이 겉으론 화려해 보여도 음반시장 침체에 공연장 부족으로 몇몇 스타들 외엔 생계도 막막한 이들이 많아요. 원로 선배들의 복지혜택을 비롯, 협회 차원에서 투명한 가요상을 제정하는 일을 할 겁니다. 미국의 그래미상처럼 코래미상을 만들어볼까 하는 등 아이디어는 많은데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음반시장은 어렵다고 해도 전화벨 소리 등 새로운 영역으로 음원 수입은 급증하는데 가수에겐 이익이 없나요?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에도 저작권이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히트곡 몇 개 있으면 작사·작곡가는 평생 따뜻하게 삽니다. 가수는 인기있을 때 그저 노래만 하다 인기 끝나면 그뿐이에요. 노래는 우리가 불러줬는데 정작 저작권에서는 배제되어 있고, 요즘 이동통신사 등을 통해 음악을 다운받는 것 역시 통신사에서 50%를 가져가고 저작권쪽에서 분배되고 가수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2·5%랍니다. 그런 불공평한 법이나 규제를 없애는 데 노력할 겁니다."
-최근에야 보신각 타종을 하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란 것이 밝혀졌던데 왜 그동안 자랑을 안 하셨나요.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셨지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본적이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태창 1번지에요. 서울로 치면 종로 1번지나 마찬가지죠. 1919년 3월16일 태인면에서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장꾼들에게 나눠주는 등 독립운동에 힘쓴 송영근 선생이 할아버지십니다. 자수성가하신 증조할아버지는 만석꾼으로 금광을 운영하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투사에게 활동자금을 대주다가 일본인들에게 금광과 땅을 모두 빼앗겼어요. 할아버지는 군산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제가 세 살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안납니다. 애국자인 조상 덕분에(?)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달걀도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봄엔 새싹 뜯어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 먹고 덫을 놓아 토끼가 잡히면 오랜만에 육식하는 게 일상이었죠. 고등학교 학비를 내지 못해 졸업장도 못받았어요. 나중에 가수로 출세하니 자랑스러운 동문이라고 졸업장과 감사패를 주더군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도 하고, 이발소에서 보조 노릇도 하고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76년 해뜰 날이 히트하기 전엔 무명생활도 길었었지요."고등학교 때 전주방송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서울 노래경연대회에서 상을 타서 동네에선 유명했죠. 가수 김상희씨 남편인 유훈근씨가 당시 프로듀서였는데 오아시스레코드에 소개해서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했습니다. 레코드사에 들어와서 1주일 뒤에 험상궂게 생긴 신인이 들어왔는데 나훈아씨였어요. 가수가 되고도 빛을 못봐 언젠가 내게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왔으면 좋겠다란 마음으로 작사·작곡해서 부른 노래가 '해뜰 날'이에요. 당시엔 아이들이 옹알이 대신 해뜰날을 먼저 중얼거릴 만큼 인기였다니까요."
-그렇게 인기였는데 미국엔 왜 가신 겁니까?"80년부터 88년까지 미국에서 살았더니 전두환 정권 들어서고 미국에 갔다고 누가 '형님도 민주화 운동 하셨냐'고 묻더군요. '해뜰날'로 가수왕까지 올랐지만 이듬해 결혼하니까 해가 지더군요. 컬러TV가 나오면서 주수입원인 극장 리사이틀도 내리막길을 걸어 생계가 막막해 잠실에서 분식집을 했어요. 만삭의 아내가 배달통을 들고 배달하는 게 안쓰러워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간 겁니다. 미국생활 초기엔 직장이 없는 저를 대신해 일본에서 유학해 일어에 능통한 아내가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독립운동 유공자 자손이 기모노 입고 일하는 아내한테 빌붙어 산다는 게 너무 한심해서 그때부터 정신차리고 일을 했죠. 그후로 샌드위치 전문점에 슈퍼마켓도 여러 개 운영했고 버지니아에서 쇼핑몰을 구입해 큰 돈을 만졌어요. 그런데 살 만해지니까 몸이 아픈 겁니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진단한 병명이 홈식(Home sick)이래요. 향수병! 그래서 한국으로 온 겁니다. 병 고치러요."
-한국에 오니 병이 낫던가요?"한국땅 밟고 노래 부르니 힘이 펄펄 나더군요. 미국에 살 땐 대형저택에 벤츠600 타고 다니며 후배들이 미국 공연 오면 선물도 사줬어요. 그런데 후배들이 돌아가면 고향 생각도 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혼자 울었죠. 다시 귀국해 6년 동안 단칸방에서 어머니랑 살았는데 한여름엔 너무 더워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데도 좋았어요. 그후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 '우리 순이'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이 계속 히트했죠. 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가수들의 이미지가 나빴는데 전 부자인데도 노래가 좋아 귀국했다고 알려져 욕은 안 먹었어요."
-히트곡도 많고, 훌륭한 부인에 잘 자란 두 아들 등 정말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제가 대학을 못나왔는데 이대 출신인 아내가 대학을 두 개 나왔으니 공평한거죠. 복도 많지만 고생도 많이 했어요. 12년 전엔가, 강남구 삼성동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원룸 17가구를 만들어 임대업을 했어요. 노후에 월세나 받아먹으면서 살아도 되겠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외환위기가 터지고 전세금 반환 소송에 휘말려 그 집이 부도나서 결국 건물도 은행에 넘어갔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죠. 아내와 두 아들은 그길로 미국으로 갔고, 저는 혼자 마포 원룸에서 살았어요. 임대업자가 하루 아침에 세입자가 됐죠. 다행히 98년에 '네박자'가 빅히트를 해서 지금 살고 있는 한남동 집도 마련하고 그후론 계속 편안합니다. 아이들도 반듯하게 잘 자랐고…."
-송 선생의 노래들은 좀 유치할 만큼 부르기 쉬워 더 인기인 것 같습니다."노래가 뭡니까. 우리 시대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거 아닌가요? '세월이 약이겠지요'도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시는데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할 형편이 못되니까 '세월이 흐르면 병도 나으시겠지'란 답답한 심정을 담아 쓴 곡이고 대부분 서민들의 정서를 파악해 그들의 애환을 적신 노랫말들이어서 사랑받는 것 같아요. 저는 남들이 만들어준 노래도 그냥 안 불러요. '네박자'의 원제도 '뽕짝'이었는데 제가 가사도 고치고 편곡도 해서 3년 만에 재탄생한 겁니다. 남들이 만든 기성복을 입는 게 아니라 제 몸에 맞는 맞춤복을 입는 거죠. 트로트를 비롯해 노래를 잘 부르려면 목소리만 좋아야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보는 눈, 노래를 듣는 귀, 다양한 경험이 노래에 녹아 나와야 해요. 날이 갈수록 노래가 무서워지는 것이 노래 제목이나 가사가 마치 주문 같아서예요. 슬픈 노래 부르면 인생도 슬퍼지고, 즐거운 노래 부르면 인생도 활짝 펴고… 그래서 보통사람들도 항상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는 마음으로 즐거운 말, 긍정적인 말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머 감각이나 입담이 대단해 젊은층에게도 인기인데요."전 처절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남들은 재미있다고 웃으니 환장하겠어요. 미국에 처음 가서 미국사람이 제 차를 박고도 뻔뻔하게 나오기에 'You car car, Me car no car?'(당신 차만 차냐, 내 차는 차 아니냐)라고 따진 것, 그리고 슈퍼마켓에 흑인 강도가 들어와 '목숨이 아까우면 돈을 내놔라'라고 영어로 쓴 쪽지를 못 읽어서 제가 아는 영어로 친근하게 'What's Your name? May I help you?'를 물었던 애기를 하면 다들 넘어가요. 그런데 예능프로그램에서 너무 출연요청이 많이 와서 피곤해요. 또 제가 아직도 사투리를 못고쳐서 처음엔 전라도 사투리 쓴다고 지적도 받았는데 이젠 구수하다고 좋다더군요. 현철이가 경상도 사투리 안 쓰면 저도 안 쓸 겁니다."
-가수협회장으로 바쁘고, TV 출연도 많은데 연말마다 디너쇼도 꼭 하더군요."이번에도 23일부터 힐튼호텔에서 이틀간 하는데요, 정말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대관료며 무대장치비에 돈이 더 들어가요. 노래에 목이 말라 해마다 콘서트를 마련한다는 걸 꼭 밝히고 싶어요. 제가 히트곡이 참 많은데 그 어느 TV 프로그램이나 공연무대에 가도 2, 3곡 이상 부를 수가 없잖아요. 다양한 제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또 제가 노래를 마음껏 불러보기 위해 콘서트를 마련하는 겁니다. 오신 분들이 고마워서 선물도 드리고요. 가끔 태진아씨와도 합동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제가 워낙 히트곡이 많아 비교가 되지만, 그래도 티격태격하며 함께 웃고 울 동료가 있어 고마워요. 힘든 일도 많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 우리 모두에게 해뜰 날이 오지 않을까요?"
<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 - 재취업·전직지원 무료 서비스 가기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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