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박상옥을 문제 삼는 野의 자가당착

김창균 부국장 겸 사회부장 2015. 3.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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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창원시장은 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신한국당의 수도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김문수·이재오·홍준표 같은 개혁 성향 젊은 피를 수혈했는데 안상수도 그중 하나였다. 총선 직후 한 신문은 안상수 당선자를 '5공 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박종철군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 고문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권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안 시장은 총선을 1년 앞두고 '박종철 사건 수사검사의 일기'라는 책을 펴냈다. 박종철 사건 수사 경력을 정치적 상표로 삼은 것이다. 안 시장이 1995년 5월 23일 가진 출판기념회에는 고(故) 박종철군의 아버지도 참석했다. 그날 안 시장은 인세 1000만원을 박종철기념사업회에 기부했다. 박군 가족이나 재야 세력도 안상수 검사의 수사를 긍정 평가했다는 방증이다.

당시 야당도 "검찰이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이었다. 사건 다음 해인 1988년 10월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평화민주당(총재 김대중) 조승형 의원은 참고인 안상수 변호사를 상대로 "지금 증언하고 계신 분(안상수)이나 검찰 수사팀은 당시에 굉장히 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바람직하게 수사하려고 했는데 결국 상부 지시로 그 뜻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당시에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야당을 대표하는 법조인이었던 조승형 의원은 1994년 9월 야당 추천으로 헌재재판관이 됐다. 신창언 부산지검장도 여당 추천 몫으로 함께 헌재재판관이 됐다. 신 지검장은 박종철 사건 때 서울지검 형사2부장으로 안상수 검사를 지휘한 주임검사였다. 당시 7명의 재판관이 한꺼번에 임명됐는데 대한변협과 야당은 물망에 오르던 후보 중 두 사람에 대해 반대 성명을 냈다. 신 지검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고 265명이 참석한 국회 표결에서 219명이 찬성했다. 야당에서도 대부분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신 주임검사, 안 검사와 함께 박종철 수사팀이었던 박상옥 검사는 사건 발생 28년 만인 지난 1월 21일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됐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인사청문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박 후보자에게 '박종철 사건의 은폐 조작을 묵인했다'는 혐의를 씌웠고, 야당은 그 눈치를 보며 청문회를 보이콧하고 있다.

박종철 사건 당시 검찰 수사는 공(功)과 과(過)가 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를 뒤집고 부검을 통해 물고문 사실을 밝혀낸 일은 박수받을 일이다. 반면 먼저 구속시킨 피의자 2명으로부터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듣고도 상부의 압력에 짓눌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가 있기까지 석 달 가까이 우물쭈물했던 것은 흠결로 지적받는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였던 1987년 안기부와 경찰을 앞세운 폭압 체제가 막바지 기승을 부렸다. 그런 정국 속에서 권력 외곽에 밀려나 있던 검찰이 경찰 관련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은 나름 최선을 다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당시 평가였다. 그런 사정을 기억하고 있던 1990년대 야당과 재야 세력은 신창언 헌재재판관 선출과 안상수 국회 입성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이다.

신창언·안상수 두 사람에게 묻지 않았던 책임을 박상옥에게 지우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치에 닿지 않는다. 1987년 1월 박종철 사건 때 신 주임검사의 경력은 17년, 안 검사는 8년이었던 반면 박 검사는 1984년 9월에 임관해 2년을 갓 넘긴 '초짜'였다. '박종철 사건 수사검사의 일기'에서 필자 안 검사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신 주임검사다. 반면 박 검사의 이름은 370쪽 중에 열 번쯤 등장하는데 그것도 단순한 지시를 수행하는 내용뿐이다. 또 박 검사는 1987년 3월 16일 여주지청으로 발령받아서 서울지검의 박종철 수사에서 손을 뗐다. 피의자들이 "공범이 3명 더 있다"고 폭로한 2월 27일로부터 보름 남짓 지난 시점이다. 반면 신 주임검사와 안 검사는 5월 18일 사제단의 폭로가 있을 때까지 계속 수사를 담당했다. 박 검사보다 신·안 검사 두 사람의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사건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야당은 검찰의 박종철 수사를 "굉장히 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2003년 12월 노무현 정부는 박상옥 당시 서울고검 검사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뚜렷한 사명감으로 검찰 업무 발전에 기여한 공이 현저한 자'라면서 홍조근정훈장을 줬다. 당시 민정수석은 문재인(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법무비서관은 박범계(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였다.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을 정치적 아버지로 떠받드는 야당이 이제 와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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