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된장이 먹고 싶네'

남문희 대기자 2013. 3. 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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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군 감독의 영화 < 된장 > (2010년)의 도입부는, 극중 인물의 표현대로 '뜬금없다'.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라는 인물이 '된장찌개 맛에 홀려' 경찰에 잡혔고, 마지막 남긴 유언 역시 '그 된장을 먹고 싶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고유의 맛을 잃고 살아왔는지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영화이기도 하다.

한번쯤 그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으리라. 왜 어린 시절의 된장 맛을 요즘은 찾아볼 수 없을까. 지인의 소개로 맛본 강원도 홍천 어느 농가 할머니가 담갔다는 된장 맛에서 그 실체를 느낀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엉뚱하게도 중국 연변에서였다. 지난해 9월 연변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가해서였는데, 도착 첫날 점심에 먹은 된장 맛에서 옛 시골 된장의 풍미를 느꼈다. 한 연변대 교수에 따르면 연변의 장맛은 옛 맛 그대로라고 한다.

ⓒ시사IN 남문희 3월1일 장 담그기 행사 때 메주를 들고 있는 이웅기 전 교수와 부인 안경희씨.

결국, 변한 것은 우리다. 우리의 된장 문화가 어린 시절의 그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던 거다. 사회적 기업 '바리의 꿈' 김현동 대표가 설명하는 우리 된장의 현실은 참담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연해주 정착운동을 10년 넘게 벌여온 김 대표는 몇 년 전부터 연해주산 유기농 메주와 국내 소비자 간 직거래 사업을 해왔다. 보통 장류 시장을 1조원 정도로 보는데, 그 90%인 9000억원 정도를 대형 식품업체들이 생산하는 공장 된장이 차지한다. 마트에서 일반 소비자가 쉽게 접하는 된장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우리 전통 된장과는 무관한 국적 불명의 된장이다. 우리 된장은 콩과 소금만을 주원료로, 길게는 1년6개월의 발효 기간을 거치는 '세계 최장의 발효식품'이자 대표적인 슬로푸드다. 반면, 공장 된장은 재료에서부터 밀가루, 옥수수가루 등 콩 외의 원료를 많이 사용하고, 제조법 역시 전통발효가 아닌 일본 된장(미소) 식의 속성 발효를 원용한 것이다. 일본은 습도가 높아 콩을 오래 발효시키면 부패하기 때문에, 코지균(누룩곰팡이)으로 쌀이나 밀을 먼저 발효시킨 뒤 콩과 뒤섞는 속성 발효법을 쓸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미소인데, 일제강점기에 미소의 제조법을 들여와 만들기 시작한 게 현재의 공장식 개량된장이다. 그럼에도 산업용어 사전에는 '개량된장'이 된장으로 둔갑해 있고, 우리 전통 장은 '재래된장'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 전통 장을 지켜온 이들은 누구인가. 김 대표의 설명에서 대략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대부분 영세한 규모의 농촌형 일자리로 전국에 150군데가량 존재하고, 대개는 어머니의 손맛과 아들의 경영이 합쳐진 형태다. 지역마다 맛이 달라 표준화가 어렵다." 김 대표의 설명 중 다음 대목이 귀에 쏙 들어왔다. "장 공장은 대개 그 마을의 가장 꼭대기에 숨어 있다." 이유는 맑은 공기와 물을 얻기 위해서인데, 이것이 바로 전통 장의 맛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다. 공해에 찌든 도시에서 옛 장맛이 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남문희 장을 담그는 옹기.

자연요법 전문가인 이웅기 전 호서대 교수(62·자연복지학과 및 평생대학원)가 운영하는 충남 아산의 벽송재(碧松齋)를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천안에서 아파트 생활을 해온 이 교수가 충남의 명산인 광덕산 줄기의 현 송악면 종곡리 212번지로 이사한 것은 2008년이었다. 처음부터 장 공장을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와서 보니 장 담그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벽송재 역시 마을의 맨 꼭대기, 해발 35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집 옆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맑은 공기와 물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첫째로 햇볕과 일교차다. 아랫집과 몇 미터 안 떨어졌는데도 1주일 정도 늦게 꽃이 필 정도로 기온 차가 크다. 그러면서도 볕이 잘 들어 최적의 발효 조건을 갖추었다. 여기에 부인 안경희씨(59)의 손맛이 더해지고, 마지막으로 천일염 대신 공주 영평사의 죽염을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죽염장은 천일염에서 가끔 나는 쓴맛 대신 단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입소문에 더해 학술적으로도 이미 맛에 대해서는 검증이 끝났다. 지난해 8월 충남대 김미리 교수팀이 시중의 간장과 된장 세 종류와 비교한 결과 벽송재 제품이 '구수한 맛'과 '깊은 향미'에서 모두 월등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죽염 된장의 항암 효과와 항산화력 등은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팀 등 국내 여러 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다.

장 공장은 마을의 가장 꼭대기에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교수 역시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 사업 초기인 2009년 아산시로부터 1억원의 시설비 보조를 받았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성공적이라는 것은 다른 전통 장 업체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절대 기준으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전통 장은 '누구나 쉽게 시작해서 쉽게 망하는 사업'이라고 한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판로다. 아무리 좋은 장을 생산해도 팔 길이 없어 망한 업체가 수두룩하다. 최근 2, 3년 사이 콩 값이 껑충 뛰었고, 죽염 값까지 더하면 1년 팔아 겨우 재료비를 건지는 수준이고, 인건비는 아직 꿈도 못 꾼다. 판로 확대는 벽송재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최근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어(www.ilovebsj.com) 회원제 위주의 기존 판매망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 고민이 시작됐다.

ⓒ시사IN 남문희 벽송재가 생산한 장 제품. 천일염 대신 죽염을 써 쓴맛이 나지 않는다.

현재는 회원제와 시판용으로 나눠서 판매하는데, 회원으로 가입하면 시판용의 반값에 구입할 수 있어 유리하다. 벽송재 측에는 순익이 적은 대신 한꺼번에 목돈이 들어와 재료비 부담을 덜어주는 이점이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 직전 말날(午日)에 장 담그기 행사를 개최하는데 이날은 전국의 회원과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잔치를 연다. 올해의 말날은 2월21일로 장은 이날 담갔고, 장 담그기 행사로 3월1일 약 300명이 모여 멧돼지 파티를 열었다. 종곡리 마을 풍물패의 주도하에 풍물굿이 열리기도 했는데, 아산시에서 파견한 풍물강사 김성화씨에 따르면 원래 장 담그는 날의 풍물굿은 한 시간 반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문화행사였다고 한다. 올해 5회째인 장 담그기 행사를 앞으로 잘 보완해 지역의 민속잔치로 발전시켜도 좋을 듯싶다. 지난 정부에서 한식 세계화를 떠들며 엉뚱한 곳에 재정을 탕진한 바 있다. 그러나 고유의 입맛조차 아직 지켜내지 못한 우리가 과연 세계화를 떠들 자격이 있는지 돌아볼 때가 됐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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